꼭 가야 하나?
난 6월이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일한다. 내가 일만 시작하면 서늘하다가도 왜 이렇게 뜨거워지는지, 푹푹 쪄대는 더위와 강한 바람을 맞으며 밭 골을 타면 온몸이 땀에 절고 먼지투성이가 된다. 그 몸을 하고 농막에 들어가 점심을 챙겨 먹을라 치면 난처하다. 한 끼 해결하려고 씻고 갈아입어야 한다. 얼마 전, 제대하고 한 달간 같이 지내던 아들이 해결방법을 알려주었다. 모 편의점에 파는 도시락이 가성비가 최고라고 하면서 바쁠 때 사다 놓고 먹으라고 했다. 아들이 아빠의 말을 신뢰하듯 아빠도 아들의 말을 신뢰한다. 바로 실천했다. 요것 저것 조금씩 담겨있는 반찬들이 흠잡을 때 없이 맛있다. 정말이지 한 끼 때우기에는 그만한 도시락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무척 현명하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을 때 꼼꼼히 따져가며 소비한다. 예외적으로 그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교육과 관련된 소비다. 하물며 밥 한 끼 사 먹는 데도 가성비를 따지고 사는 시대에 정말 최악이다. 어떤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학원 보내 달라고 한 적 없다. 영어, 수학, 논술, 예체능 모두 부모가 시작했다. 가계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사교육비로 국가 경제를 떠받치기라도 할 모양새다.
자신이 어디에 소질이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부모가 일방적으로 길을 정해 준다. 아이는 싫든 좋든 간에 그 길만 바라보고 걸어왔다.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자의 반 타의 반도 아닌, 시키는 대로 공부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학원에 다녔다. 어떻게 보면 부모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식이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했다. 안타깝게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필수로 거쳐야 하는 또 다른 큰 고비가 남아있다. 이 시대, 고통의 상징이 돼버린 언어 ‘취준’이다. 대학 졸업식장에서 받는 것은 졸업장만이 아니다. 수 천만 원의 금액이 적혀있는 학자금 대출 상환 고지서도 함께 받는다. 기껏 24~26살의 나이에,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잔인한 형벌이자 발목에 채워진 족쇄다. 다른 것은 생각할 틈이 없다. 갚아 나가려면 취업에 목메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원에 다니며 다시 공부한다. 취업이 여의치 않으면 늦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으로 눈을 돌린다. 그럴 거라면 애초부터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보든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빡빡한 집안 사정에도 아량 곧 하지 않고 학원비를 대주며 오로지 대학 가기만을 원한 부모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앞길이 막막한 그들의 가슴속엔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원망이 뒤섞여 있다.
그럼 어렵게 대기업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은 제쳐두고라도 경제적으로 나아질까? 인 서울이든 지방대학 출신이든 서른 중후반까지 학자금 대출부터 갚아야 한다.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쯤, 45살이 되면 퇴사해서 치킨집이라도 차려야 하는 것은 둘 다 똑같다. 기업 인사구조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있는 이상, 같은 날 입사했다고 해서 모두 끝까지 함께 갈 수 없다. 전에는 자리에서 밀려나면 소규모 계열사로 간다던가 아니면 거래처로 직급을 올려서 갔다.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그때는 기업이 문어발처럼 확장하던 시대였고 지금은 투명하고 전문화로 가는 시대다. 전문 인력이 아니라면 누구도 필요치 않다.
SKY 대학 출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원, **치과는 출신 대학 명칭을 자랑스럽게 붙여놔도 치킨집이나 여타 프랜차이즈 간판에는 대학 명칭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통계청에서 일일이 다니면서 무슨 대학 나왔는지 전수 조사해서 발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눈에 띄지 않아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하긴, 치킨집 간판에 관계도 전무한 대학 명칭을 쓰는 것도 우습기는 하다. 얼추 비슷한 **요리학원 수료라면 몰라도.
대학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 오래전, 9살 된 아들아이가 S 대학이 최고냐고 물었다. 엄마들이 모이기만 하면 아이들 들으라는 듯이 대학 얘기를 하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최고의 대학이고 너도 열심히 하면 갈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식의 미래를 아빠가 정해주고 싶지 않아서다. 자신의 미래는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 아직 어리지만 지금부터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비록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녔어도 나의 삶은 한반도로 국한됐다. 그러나 내 아이 세대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나라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S 대학도 그중의 하나 일뿐이고, 순위는 50위 정도라고 설명해줬다. 나라마다 다수의 명문 대학이 있으며 특별히 어느 대학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빠의 설명을 들은 아이는 대번 흥미를 잃어버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그날은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안암동에 있는 K 대학교 앞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아빠, 저 대학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데, 맞지?”라고 아들아이는 대뜸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자신감 충만하게 물어왔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것으로 보아 비웃음이다. 저런 대학은 오라고 해도 가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이 땅의 학부모들이 그토록 보내기를 원하는 SKY 대학이 삼류대학 아니 그 이하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는 1년 전 아빠의 설명을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아빠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학 순위에 중점을 뒀다. S대도 50등 밖에 되지 않는데, 그 아래 순위 대학은 오죽하겠냐는 뜻이다.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적어도 아이는 그깟 대학 간판에 기대어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그래, 굳이 저런 데 갈 필요 없어.”라고 대답해야 했다. 혹시라도 SKY 출신이 이 글을 읽는 다면, 어린아이가 한 말이니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 주기 바란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치킨집이니까.
아들아이는 커가면서 공부를 곧잘 했으나 대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밤잠 못 자고 죽자 사자 공부해서 굳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자신은 그렇게 공부해서 S 대학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제 생각에는 가성비가 떨어졌던 것이고 아빠가 보기엔 갈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방학 때만 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학교 친구네 집으로 놀러 다녔다. 난 아이에게 말했다. “넌 S 대학을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야”라고. 대입 시험을 치지 않았으니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게 맞다. 아들아이가 기특했다. 그 정도 배짱은 지니고 세상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자신들이 학비 보태줄 것도 아니면서 말들이 꽤나 많다. 웹툰을 한다고 대학을 가지 않은 아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뻔하게 그려졌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지, 아무 대학이라도 나와야 취업을 하지, 누구는 무슨 대학을 나와 **기업에 취직했다는 등 이러쿵저러쿵 떠든다. 난 아이가 서울로 올라갈 때 당부했다.
“네가 이제 아빠가 돼서 너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젠 아빠가 더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들 말에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잡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란 뜻이다. 아들은 알았다고 했다. 정작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음은 여느 아빠들과 다르지 않다. 아들을 믿지만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고된 길인지, 먼저 지나온 아빠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 잘 해낼 수 있겠지... 그깟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