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사람이다.
오늘도 사방이 무섭도록 후끈한 날이었다. 밭에서 일하는 도중에 또다시 폰의 알람이 울렸다. 브런치 책방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는 알림이다. 핑계 김에 그만 쉬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밭고랑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지나가는 내내, 후드득 거리며 콩잎에 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밑 그늘에 털버덕 주저앉아 뜨거운 숨을 여러 번 크게 내뱉었다. 흥미로운 것은, 땀을 무지막지하게 흘리면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신선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육체노동의 신성함은 이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잠시 땀을 식힌 후, 폰을 열어봤다. 세 편의 글이 올라와 있다. 한낮에 올라오는 에세이는 아내, 엄마, 며느리라 불리는 작가들이 쓴 글이다. 몇 개월간, 그녀들의 글을 읽다 보니 숨겨져 있는 것들이 보였다. 작가가 다르고 주제가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체념, 순응, 외로움, 불안, 구속, 폭력이란 어두운 감정들이 글 속에 공통으로 숨겨져 있다. 본인들은 그러한 어두운 표현과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이란 것은 쓴 사람 그 자체다. 아무리 들어내려 하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셔보면 소금이 들었는지 설탕이 들었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그러한 어두운 감정들은, 그녀를 아껴주고 다독거려 줄 사람들로부터 생겨났다. 상처란 것은, 별 관계없는 사람이 욕하면 기분 나쁜 것으로 끝낼 수 있지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은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모두 여자이기 때문에 남편과 시부모로부터 겪어야 하는 억한 일상이다.
결혼 전에 ‘멋지다, 똑똑하다’라는 소리를 들었어도, 여자에게 과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혼 전과 후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여자가, 김칫국물 묻은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있다. 에어컨 전기료가 부담스러워 땀으로 반질반질한 얼굴을 하고 잠든 아이에게 부채질해준다. 어쩜, 밭에서 일하는 내 모습이나 그녀들의 모습이나 엉망이기는 마찬가지다. 갓난아이를 남편에게 잠시 맡겨두고 카페에서 혼자 앉아있다가 온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작 그 이야기를 남태평양 휴양지라도 다녀온 것처럼 감지덕지하게 썼다. 바꿔 말하면, 그녀 자신을 위한 작은 시간조차도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시부모란 사람들이 뱉어내는 영혼 없는 단단한 말투에 상처를 입어도 가슴앓이하듯 한마디 못하고 듣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며느리, 아내, 엄마란 소리를 듣는다.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살아야 할까.
그것은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가 사귀면, 여자에게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남자에게는 ‘어떤 여자야‘라고 묻는다. 그렇게 보면,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의 형태를 한 XX 염색체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잘 못 돼도 한참 잘 못 됐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여자 사람과 남자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다. 전자냐 후자냐,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남자와 여자로의 구분은,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 만든 남자의 종속된 피조물로 볼뿐이다. 그에 반해, 여자 사람과 남자 사람은 휴머니즘(인간주의)의 개념이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졌다면 자신이 소중한 아내를,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그녀가 여자이기 전에 감정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해야 한다.
여기서 배우자라 자처하는 남편의 나서야 한다. 사람은 어려서는 부모의 손을 잡고 다닌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결혼 후에는 부모가 아닌 배우자의 손을 잡고 살아야 한다. 그녀가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은 시부모가 아니라 남편인 당신이다. 아내에게 꿈이 있다면 지원해주고, 격려하고, 힘든 짐은 나눠서 져야 한다. 더 나가 당신의 부모가 며느리인 아내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완고하게 어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 관습에 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그 어떤 관습도 사람을 넘어설 수 없다. 잘못된 관습은 억압이자 폭력일 뿐이다. 아내를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면, 당신의 아이들은 아내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빠를 닮으려 하고 존경하지 않을까 한다.
시부모들도 그렇다. 며느리에게 예의 운운하기 전에 사람에 대한 예의부터 차렸으면 한다. 아들에게 하는 거친 말에는 정감이 느껴지고, 며느리에게 하는 부드러운 말에는 공감이 빠져있다. 그러지 마라, 천박해 보인다. 우리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틀린 소리다. 현실은 잘난 자식과 없는 못난 자식을 차별한다. 자식도 그런데 그 며느리는 오죽할까 싶다. 게다가 자식은 당신 손가락처럼 마음대로 구부렸다 폈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인 당신들 둘이 좋아서 자식을 만들었다. 당연히 잘 키워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면에서 자식은 키웠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당신들의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식의 행복에 끼어들어 나눠 가지려고 하지 마라. 보기 추하다.
난 아이들에게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로 가르치지 않았다. 싫으면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들아이가 제대할 때쯤에 일이다. 애들 엄마는 곧 제대하는 아들에게 아래는 책상이 있고 위에는 매트리스가 있는 이 층 침대를 사주고 싶어 했다. 난 애한테 물어봤냐고 했다. 애들 엄마 말로는 아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아들이 제대하는 날 물어봤다. 자신은 싫은데 엄마가 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들아이는 군대 있는 동안 생각이 깊어지고 좀 더 유연해진 것 같지만, 난 아들아이를 나무랐다. 너는 싫더라도 부모가 좋으면 해야 하는 것을 효도라 생각하느냐 하고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부모라도 눈치 보지 말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훗날 네 아내 될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라 했다. 아들은 바로 제 엄마에게 전화해서 주문을 취소시켰다. 난 미래의 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시아버지로서, 딸아이를 둔 아빠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다.
그동안 무료한 밭일을 하면서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 준 여자 사람/작가들 마음이 조금이라도 시원할까 싶어, 밭에서 농부이자 남자 사람이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