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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ec 22. 2019

바람이 바람에게 쓰는 편지

바람의 자유로움



새벽에는 춥지만 한낮의 날씨는 따듯하다. 밭은 진창이 되어 푹푹 빠진다. 이래선 기계도 사람도 힘들다. 한창 추워져 땅이 꽁꽁 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추워지거나 따뜻해지거나 할 때면 바람이 먼저 온다.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더운 공기는 상승하고 찬 공기는 하강하는 성질로 인해서다. 봄에 바람이 많이 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난 바람을 기다린다.


한밤, 산골짜기로 부는 바람은 배고픈 산짐승의 발걸음도 멈추게 할 만큼 무섭게 분다. 형태도 무게도 없는 것이 농막을 스치면 우박이 떨어지고 천둥이 쉼 없이 치는 소리가 난다. 처음엔 바람이 내는 소리인 줄로 알았다. 아니었다, 그것은 머물러 있는 낡은 것들이 아우성치며 떨어져 나가는 소리다. 


바람은 잡을 수도 막아설 수도 없다. 팔 벌리고 빽빽하게 서 있는 거목들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고, 우뚝 솟아 있는 육중한 절벽을 스쳐 지나간다. 바람은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저 높다란 산맥도 슬며시 넘어간다. 큰바람이 찾아올 때면 차라리 경이롭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바라보면 사뭇 어제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절벽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가 썰렁하다. 지난밤, 정리라도 해 놓은 듯하다. 떨어져 나온 낡은 것들이 바닥에 고스란히 쌓여있다. 몸통에서 분리된 것들은 썩어서 거름이 되고 흙이 된다. 바람은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


바람은 어디든지 가볍게 갈 수 있다. 머물러서 치렁치렁하게 달고 살아가는 무거운 존재들과는 함께 할 수가 없다. 바람은 머물러 있는 것들을 이해하지만, 머물러 있는 것들은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람은 바람 하고만 섞인다.


세상은 바람의 자유로운 속삭임을 부끄러워하고 낯설어한다. 태초의 언어가 지닌 순수한 의미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사랑한다. 꿈 등이다. 오래전, 신의 낙원에서 쫓겨난 팍팍한 사람들은 그런 찬란한 것들은 바람처럼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례하게도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아름다움을 치렁치렁한 화려함으로, 사랑을 끈적한 난잡함으로, 꿈을 번쩍이는 유명세로 바꿨다. 그들에게 바람은 이방인일 뿐이다.


세상 곳곳에는 많은 바람이 있다. 아쉽게도, 예전에 누구처럼 자신이 바람인 줄 모른다. 보이지 않기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취급받아 외로웠고, 멈춰있기에 아팠다. 훗날 자신이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거운 것을 버렸고, 모든 자유로움을 구속하는 가당치도 않은 경계를 넘어갔다. 그때부터는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멈춰있는 것은 바람일 수가 없다, 불어야 한다. 나는 당신도 나와 같은 바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바람은 감성에 입각한 자유의지다. 마음껏 울고 웃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을 꿈을 꾸는 자들은 모두가 바람이다. 나는 그런 바람들과 어울려 들판과 바다의 떠 있는 별빛 사이를 맘껏 가르는 꿈을 꾼다.


어젯밤에 세찬 바람이 불었다. 뉘 집의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땅이 꽁꽁 얼었을 것 같다. 농부는 그만 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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