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Apr 12. 2020

죽음은 벚꽃잎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2335명, 7838명, 10,247명, 289,...

잔인한 봄이다. 벚꽃잎이 봄바람에 몸통으로부터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난 그 가벼움에 몸서리친다.


세상 곳곳에서 죽음이 넘실거린다. 군용 차량이 운구행렬이 되고, 냉동 컨테이너에 들어가고, 길거리에 방치된다. 마지막 가는 길, 엄숙하고 존엄해야 할 절차마저도 생략됐다. 순식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죽음이 일어나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은 자는 숫자일 뿐이다. 죽음의 가치가 결코 가벼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봄바람에 떨어져 의미없이 밟히는 꽃잎처럼 가볍게 여겨서다. 


많이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멈춰 서는 법은 없다. 살던 집은 누군가 살 것이고, 자리는 누군가 차지할 것이고, 물건은 누군가 나눠 가질 것이다. 산 사람이 죽은 자의 것을 차지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래, 거기까지만 하자, 더는 나가지 말자. 추하고 역겹다.


과거, 그들은 전쟁의 잔인한 참사 현장에도 침몰하는 여객선에도 없었다. 생과 사가 한순간에 갈리는 무서운 현장엔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커녕 의지조차 없는 나약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킬링필드의 참혹한 진실을 고발한 시그니 샘 버그와 광주 민주화운동을 세상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같은 기자의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행여나 다칠까 싶어, 멀찍이 떨어져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면서 베끼고 교묘하게 편집한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사망자가 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만 명이 돼버렸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세상은 감히 통곡 소리조차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 모든 사람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하데스의 강가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인류에게는 공포고 그들에게 얍삽한 기회였다. 자신들과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슬쩍 몇 마디 문구를 바꾸고 편집하여 전달한다. 제목만 본다면 분명히 이 땅에서 일어난 다급한 사건이다. 많이 읽고, 많이 배우고, 많은 논리로 무장한 그들에게 그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다. 펜이 무뎌져서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무뎌질 펜조차 없어서일까?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는 천박한 엘리트주의 노름에 빠져있다. 빈틈없이 짜 맞춘듯한 문장과 매끄러운 보도에선 차가운 이성도, 끓는 감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드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명쾌한 말과 정제된 글에선 울림은커녕 진득한 악취만 풍긴다. 읽기도 듣기도 싫다. 오죽 비굴하면, 하등의 망설임도 없이 존엄한 죽음마저 벚꽃 놀이 인파 보도하듯 가볍게 이용할까 싶다.


그들의 목적은, 지구 저편에서 떠나간 자들을 연민하거나 이 땅에서는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바람이 아니다. 빠르게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처럼 먼 곳의 공포를 옮겨오고 싶어서다. 공포는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혼란을 야기한다. 급기야 대중의 원망은 한 곳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의 최상위 포식자임을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그들은 불안을 널리 퍼트리고 다시 그것을 먹고사는 음흉한 자들이다.


과거, 그들은 외세가 침략했을 때 민족을 팔았고, 독재 시절엔 협조를 했고, 지금은 거대 경제집단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변화하지 않고 경극배우 가면 갈아쓰듯 변신하고 기생하며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그래서일까, 자신들은 내일도 굳건히 존재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생겼다. 그들의 유례는, 근대사에서는 보면 길게 보이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매우 짧다.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입방정으로 먹고살았던 이야기꾼이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정보화 시대에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으면 더 좋은 존재들이다. 자신들이야,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착각하지만, 대중의 생각은 다르다. 꼭 그들이어야 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중은 천진난만하지 않다. 그들이 의도한 대로 믿고 판단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만큼 배우고, 읽었고, 보다 논리적이다. 게다가 세상 곳곳에 살고 있다. 이곳이 오밤중이면 그곳은 한낮이다. 그들이 편집하기도 전에 대중은 이미 알고 있다. 소식은 빠르게 인터넷을 타고 대중에게 들어오고 판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불안을 소리치면 대중은 희망을 외친다.


그래서 겨우 두 장의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서 긴 줄을 섰고, 의료진들은 대구로 달려갔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있었기에 피 흘리며 독재와 싸웠고, 촛불을 들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희망은 역동성을 만들어 신명 나게 춤추게 한다. 대중이 희망을 품을 때마다 그들의 영역은 점차 사라져 갔다. 달도 차면 기운다. 펜으로 가장한 녹슨 칼날을 휘두르던 광기의 시대는 끝났다. 그들만의 호화롭던 짧은 암흑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어간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모두가 자신들이 벌여 놓은 일이다.


잔인하고 화려한 봄이다. 봄바람에 맥없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고 죽음은 벚꽃잎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이전 11화 헐렁한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