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게 겉치장에 신경 쓰는 사람은 멍청하다. 그도 그중에 한 명이다. 보고 있으면 피곤할 정도다. 젊어서 뿔난 망아지처럼 날뛸 땐, 그의 옷은 클래식한 영국제 오리지널 D브랜드였고 여행용 가방은 S사 시계는 S나라 볼펜은 M자로 시작된 것을 넣고 다녔다. 그가 낯선 도시 길거리에 흘리고 다닌 볼펜만 해도, 금액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원은 됐지 않았을까. 대충 걸치고 현관문만 나서도 본인보다 걸치고 있는 물질의 값어치가 더 나갔다.
뭐 하나를 사도 최고의 가치를 추구했던 오만한 소비심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꼭 집어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가끔 마트나 서점에 갈 때면 L 백화점 옷 매장에 들려보기도 한다. 종업원은 눈치가 빠르다. 가격표를 보지 않고 빼곡한 옷 틈 사이를 슬쩍슬쩍 벌려보고 지나간다. 저렇게 세상 편하게 차려입은 사람은, 젊은 층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권하면 가격과 상관없이 넙죽 사 입을 것이다. 다가서자마자 "없네요"라는 잘라낸 말투에 기대는 바로 깨진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옷을 선택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남방은 글자, 그림, 무늬가 없어야 하고 하늘색이나 검정, 회색톤의 단색에 긴소매야 한다. 그는 외출할 때 반소매를 입지 않는다. 특히 상표가 보이지 않아야 하고. 혹여 보이더라도 감출 수 있어야 한다. 내 돈 주고 사 입고 걸어 다니는 광고판 역할까지 해준다는 것은 무척 억울한 일임이 분명하다.
바지를 고를 땐 더 심각하다. 젊어선 46인치였던 허리가 나이 들며 34인치로 순차적으로 내려왔다. 허리 사이즈에 맞춰 바지를 사면 기장을 줄이거나 늘리지 않았다. 비좁은 매장 탈의실에서 입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딱 맞는다. 얼굴만 받쳐준다면 시중 기성복 바지 모델을 할 정도로 절대 몸매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본인을 우월한 족속으로 여기는 작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이다.). 문제는 아랫단이 좁지 않은 일자로 된 진 바지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요즘 나오는 스키니진은 발목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져 입기도 벗기도 불편하다. 그가 일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발목에 족쇄를 채운듯한 조임이 싫어 서고. 둘째는 배 볼록 나온 나폴레옹이 꼭 끼는 레깅스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상되어서다. 물론, 그가 훨씬 키가 크고 전쟁광 나폴레옹과 달리 평화주의자다.
지금 그의 외출복이라곤 진 바지 4벌이 전부다. 그것도 두벌은 나폴레옹 바지다. 몇 년간 사지 못해서다. 전 국민 외출복이 돼버린 아웃도어 등산복은 입지 않는다.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것 같다. 내게 맞는 옷이 내 옷이다. 쓸데없이 가지고 있어 봐야 짐이다. 지난여름이었다. 명품이 무척 어울리는 발랄한 계집애가 말했다.
"형은, 더운 날씨에도 하늘색 남방 팔 걷어붙이고... 검은색 일자 진 바지, 갈색 등산화를 신었을 때가 가장 멋져."
그는 우스웠다. 비싼 것으로 칭칭 감고 다니던 젊을 때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나이 들어 듣고 있다. 자신만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데 꽤 오래 걸렸다. 최고의 가치는 옷에 달린 브랜드 상표가 아니다.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시간을 소비한다. 그래서 멍청하다.
그의 멍청한 버릇은 생활 전반에 습기처럼 차올랐다. 남의 것을 모으지 않는다. 그 많던 책도 다 갖다 버렸다. 인문고전이니 하는 것들도 지니고 있어야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옷장에 입지도 않는 옷 주렁주렁 걸려있듯 내 생각이 아닌 것을 끌고 다녀야 짐이다. 멋진 서재를 꾸미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때그때 사들이는 책으로도 좁다란 농막은 넘쳐난다. 궁금하면 인터넷 찾아보면 된다. 사후에, 아빠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그의 아들이 처치 곤란할까 걱정이 앞섰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젊은 날 앨범을 태워버렸듯 수시로 버려준다. 그래도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 간혹 브런치 작가들이 친필 서명해서 보내준 책과 작품이다. 일상의 고단함과 아련한 꿈의 무게가 배어있는 책은 무겁다. 얼마 전에도 권호영 여행작가로부터 책을 받았다. 소심한 욕심이라면, 그런 상큼한 문장이 살아있는 책들로 농막을 채우고 싶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다. 지난 편들을 유심히 읽은 독자라면 발견했을 것이다. 그의 글에는 죽은 자의 명언을 인용한 문장이 없다. 역사와 인문고전을 재해석한 에세이라면 모를까. 타인의 문장을 끼워 넣지 않는다. 남의 브랜드로 치장하고 싶지 않다. 산자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살아있는 자를 섬기지 않는다. 뜬금없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영화감독, 뜨는 연예인에 대한 글은 쓰지 않는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땀과 열정으로 빚어낸 유명세에 달랑 숟가락 하나 들고 달려들 만큼 초라하지 않다. 자신은 평론가도, 정치인도, 기자도 아니다. 요즘은 기자가 소설을 쓰고 작가가 기사를 쓴다지만 자신은 전통적 작가로 남고 싶어 한다. 배울 수는 있어도 베껴봐야 내 것 안 된다. 아무리 좋은 문장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의미 없다.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어색함이다.
글의 가치는 문장에서 나온다. 언젠가"왜 그렇게 글을 늦게 쓰냐"라고 어떤 작가가 물었다. "글자는 쉽게 쓰는데 문장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글이란, 글자로 표현되는 문장과 생각의 결합물이다. 문장 없는 글은 빈약하고 생각 없는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쓰더라도 거르고 골라내는 지루한 여정에 오른다. 뜨거운 감성은 가슴을 벗어나 혈관을 타고 차가운 뇌로 치닫고 돌아 다음 목적지인 심연으로 빠져들어 간다. 비로소 초고가 완성된다. 초고를 채에 쏟아서 고르면 굵고 거친 것은 걸러진다. 다시 주워 담아 좀 더 고운 채에 넣어서 고른다. 그렇게 과할 정도로 계속 골라내다 보면 섞여 있던 불순물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거친 것은 버려지고 곱고 담백한 것만 남는다. 탈고가 끝났다. 그제야 독자에게 보여준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다.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는 유행 따라 입지도, 빠르게 쓰지도 않는다. 고르고 골라가며 나름의 방식대로 느리게 살아가는 멍청이다.
권호영 여행작가의 브런치 필명은 Erin and You이다. 작가 특유의 상큼한 문장을 읽으면 소풍 나온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함께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한번 방문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