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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Oct 17. 2020

비좁은 틀 속에 욱여넣어진 청춘




볼빨간 그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들이 사라졌다. 


한결같이 붉은색의 볼터치, 뒤로 말아 올린 머리, 팽팽하게 당겨진 유니폼에 검정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억지로 욱여넣은 것 같다. 애초에 남성야릇한 시각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되었음에도 격조 있는 예의로 포장됐다. 어쨌든, 선택 여지없이 좋든 싫든 규정에 따라야 한다. 우리는 그녀들을 항공 승무원이라 부른다. 서울 집이 공항과 가깝다. 그녀들과 수시로 마주쳤다. 출근할 때는 터질 듯 달라붙는 치마와 힐을 신고 뛰고, 퇴근할 때는 기운 없이 느직느직 걷는다. 비좁은 비행기에서 온종일 힐을 신고 있어 발과 다리가 붓고 아파서다.


어느 날, 끈한 시선을 감내하며 열심히 일하던 수많은 그녀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코로나로 인해 항공사가 문 닫을 지경이 됐다. 몇 달이 지났다. 반가운 그녀들을 다시 만난 것은 카페였다. 다시 하늘을 날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혹여 자리가 난다 해도, 매년 배출되는 예비 새내기 승무원들이 차지한다. 모두가 노트북과 책을 펴놓고 있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지만 해도 너무한다. 유치원을 다녔고, 피아노, 태권도, 수영을 비롯해 고입, 대입 학원을 섭렵하고 토익과 영어 회화 학원까지 마쳤다. 본인들 좋아서 시작한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인 기성세대가 이구동성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한 것뿐이다. 다수가 동의하면 부정도 긍정으로 둔갑한다. 그 나이 되도록 맘껏 놀아 본 적도 없다. 이제 또다시 공부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니라 중간 정착지인 학원을 경유해서 취업으로 통한다.


그녀들의 심정은 복잡하고 다급했다. 그동안 뒷바라지해 준 부모에게 미안했다. 기성세대에 대한 냉소와 분노도 섞여 있다. 자신들의 잘 못이 아님에도 낙오자가 된 기분이다. 당장 학자금 대출부터 갚아야 하고 원룸 월세도 내야 한다. 아직도 현업에서 일하는 나이 든 부모에게 손 벌릴 수도 없다. 초등학교 이후엔 꿈꾼 적도 없지만, 이제는 꿀 수도 없다. 그 꿈도, 내 꿈인지 부모의 꿈인지 모호했다. 근무 조건이 열약해도 취업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다녀야 한다. 막되 먹은 항공사 대표 딸내미에게 손찌검당하고, 덜떨어진 회장 앞에서 기쁨조가 되어 춤췄다. 그러면서도 승객들에게는 미소로 대했다. 알량한 자존심과 수치심은 허공으로 던져버린 지 오래다. 이런들 뭔들 못할까 싶다. 무엇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그 잘난 기성세대는 본인들 욕망 틀 속에 가놓고 키웠다.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데' 하며 다그쳤다. 그들의 정신은 물질이 홍수처럼 불어나던 산업화 시대의 카피 본이다. 뼛속까지 자본화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 품성조차 돈과 맞바꾸었다. 하다못해, 순수해야 할 종교, 문학, 학문까지 돈을 섬긴다. 그들의 의식 속엔 부동산, 지위, 체면으로 꽉 채워져 있다. 여자는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된다는 진부한 성공 방적식도 가졌다. 여기서 좋은 사람의 개념은 명확하다. 사랑과 미래의 가능성을 배제한 오로지 현재 보여 줄 수 있는 경제적 가치다. 그 나이 때 경제력을 갖춘 남자가 몇이나 될까. 부모의 능력 아니면 불가능하다. 설사, 한다 해도 평생 시댁 종노릇 벗어날 수 없다. 새장에 갇힌 앵무새처럼 듣는 말 그대로 따라 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좋은 며느리는 될 수 있어도 자신에겐 최악이다.


어디 그녀들뿐일까. 이 땅에 사는 청춘 남녀 모두가 겪는 고난의 발걸음이다. 한 번도 비좁은 틀에서 벗어난 적도, 스스로 결정해 본 적없다. 꿈에 대한 본능일까. 시선은 저 높은 창공 바라보지만, 마음은 울고 있다. 훨훨 날고 싶은데 날개가 퇴화했다. 대충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그마저도 힘들 것 같다. 어쩌다, 누군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성공하면 바로 베끼고 따라 한다. 사회는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고 호들갑이다. 세련된 유명 강사나 교수가 나와 창의력을 상품으로 만들어 장사한다. 돈과 시간 들인다고 없던 창의력이 생길까. 창의력이란, 여유로움과 자유로움 속에서 낭만적 상상을 무한정 펼칠 때 나온다. 그런데 쫓아다니느니 차라리 방안에 누워 뒹굴거리고 멍 때리는 게 훨씬 도움된다.


이러한 조건은 기성세대가 일찌감치 만들어줬어야 했다. 우리는 빠르고 바쁘게만 살아와서 순고한 가치관은 팽개쳐두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해야 한다. 기다려주고, 다독거리고, 어디 아픈지 물어보고, 응원해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의무다. 우리가 양보해서라도 너희가 꿈꿀 수 있도록, 최소한 먹고 자는 것은 책임져 주겠다고 나서야 한다. 하지만 악착같은 그들은 끝까지 인색했다. 알바 시급 몇 푼 올리는 것도, 기숙사 짓는 것도, 청춘에게 지원금 주는 것도 머리띠 두르고 반대한다. 별 해괴한 경제 논리를 다 갖다 붙이고 먼 나라까지 끌어들인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스처럼 된다고 한다. 그 나라들은 줘서 망한 게 아니라 부패로 망했다. 갑자기 애국자라도 된 듯 나라를 들먹이며 거창하게 따진다. 오로지 본인들의 알량한 금전적 이해타산 때문이다. 참으로 역겨운 자들이다. 젊음에 양보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그렇다고 볼빨간 그녀들이나 이 땅의 청춘들은 성급하게 실망할 필요 없다. 내세울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젊음은 당연히 잃을 도 없다. 뭐를 두려워할까. 괜찮다, 누구나 그렇다, 아무 일도 아니다. 꿈은 크고 작음 없다. 꿈꾸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다. 지금이라도 비좁은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면 된다. 꾸며 살고 싶다면, 방해하고 억누르는 존재들에 쉼 없이 저항해야 한다. 젊음은 항해야 젊음이다. 절대로 몰염치한 기성세대는 닮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뿐 아니라 개인의 삶도 망친다. 어설프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타협하지 마라. 그들이 하는 행태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고 욕해야 한다. 세대 간의 이해와 화합이란 성인군자 같은 소리에 현혹되지 마라. 본인들 맘 편 하자고 하는 면책특권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이미 그들은 단계를 넘어갔다. 그래야 닮지 않는다. 기성세대인 나는  신들에게 욕먹을 준비가 돼있다.




타이틀 이미지/ 독창적 현대 미술의 작가인 마틴 C, 하스트의 알루미늄 오일 페인팅은 반짝이는 차가움 속에 감추어진 구겨진 여인의 얼굴이 있다. 위의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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