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그의 어깨부터 오른팔 전체에 감각이 사라졌다. 의사가 집도를 시작했다. 좀 전에 장난스러운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술대에서 생사를 결정지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취로 인해 상망에 빠져들었겠지. '상망'은 의학적 용어다. 나이 든 사람이나 심각한 부상 입은 사람이 마취로 인해서 잠시 겪어야 하는 허상을 말한다. 치매와 다른 점이라면, 현실을 인식하고 주변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라면 한 번은 겪어야 할 그때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떠오르지만 달리 남길 말은 그다지 없을 것 같았다. 평소에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다 말해줬고 온 힘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이다. 소망한다면, 창가에 놓인 침대에서 누워 노트북에 글을 쓰고 있다가 힘없이 손이 툭 떨어지는 순간에 마치고 싶다. 미쳐 완성되지 못한 글은 그녀만이 알 것이다. 만약, 허약해진 육체로 인해 허상이 보인다면 상망보단 상몽을 하고 싶다.
별이 뜨고 바람 부는 바닷가에 앉아있다. 혼자가 아니다, 옆에는 어려서부터 항상 함께해온 상상 속의 그녀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도 나이 들어갔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얼굴은 주름졌다. 언제나처럼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말한다. 당신은 어쩌다 무책임하게 태어났지만, 책임을 다했고, 자신만의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둘은 이따금 밤하늘을 쳐다본다. 현실에서 잊혀버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드디어 수많은 그들이 나타나 밤하늘을 밝히며 가로지른다. 그토록 기다리던 여행을 떠날 시간이 됐다. 둘은 반짝이는 작은 조각들로 부서져 내린다. 잠시 밤바다 위를 너울거리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다. 바람은 반짝이는 조각들을 별똥별 무리로 이끈다. 그들만의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아무도 둘이 한때 세상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퇴원할 때가 됐다. 간호사 대기실로 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구리 살을 집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뭘 얼마나 주입했기에 살이 이렇게 찌고, 잠든 사이에 본인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링거 바늘 꽂고 갔냐고 말이다. 그의 계속되는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가 퇴원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집에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호텔 1층에 자리한 카페다. 지난 입원 기간에 생각했던 것을 쓰려고 해서다. 그는 단골손님이다. 산골에 가지 않을 때면 서점 아니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거의 전용화 돼버린 자신의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아저씨! 하고 반갑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다. 영화 홍보 일을 하는 그녀(32)는 같은 동네에 산다. 둘은 무슨 모임 같은 데서 만난 사이가 아니다. 동네 편의점에서, 카페에서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다가 만났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됐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친구와 카페에 온 듯했다. 둘은 마주 앉아 각자 일을 하면서도 간혹 대화도 나눴다. 누가 보면 아빠와 딸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 상황은 그가 가볍고 편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둘은 카톡을 하고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나는 관계도 아니다. 가끔 마주치는 것뿐이다. 가벼움 앞에는 성별과 세대도 무의미하다.
그는 높고 낮고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않고, 바람처럼 사람들 사이를 춤추며 가볍게 스쳐간다. 머무르려고도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가벼워야 한다, 무거우면 깊이 가라앉아 떠오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