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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Aug 23. 2020

존재의 이유


그는 자기 아들과 동갑인 착한 아이(24)를 만난 것은 일 년 전 모 집단에서였다. 그 아이는 스포츠음료 한 병을 사 들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가 다가오자 들고 있던 것을 건네주는 것으로 인연은 시작됐다.



사실 처음부터 둘은 호기심을 느꼈다. 단지 서로 모른 척 관찰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많은 사람 중에 그 아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오래전 자신을 닮아서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착하고 본인에게는 가장 나쁜 사람이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그 짓을 일찍 끝냈고 그 아이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죄송해요'와 '제가' 등 공손하면서도 복종스런 언어를 잘 썼다. 행동도 언어와 일치했다. 굳이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했다. 보는 사람마다 착하다며 칭찬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수고를 덜어 줌으로써 마지못해 뱉어낸 무의미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 아이 또한 도드라지게 보일 수밖에 없는 그를 부럽게 바라봤다. 회색의 머리칼을 한 중년의 사내는 이질적으로 느낄 만큼 자신과는 철저히 정반대의 성향을 지녔다. 본인은 사람이 무섭고 어려운데 그는 편안함을 넘어 쉽게 다가갔다. 오히려 사람들은 장난기 가득한 웃는 얼굴의 그를 어려워했다. 다수로 뭉쳐있는 집단조차도 말이다.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원숭이처럼, 사람도 모이면 다시 끼리끼리 소규모 집단으로 분화된다. 좋게 말하면 뜻이 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나쁘게 말하면 배타적인 패거리다. 대부분 패거리에 가까웠다. 편 가르고 헐뜯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야만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털 없는 원숭이 사회에선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곳도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기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고 그는 속하지 않았다. 물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범주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평소에는 사람이 귀찮은 듯 혼자 지내다가도 가끔은 패거리들 중앙으로 불쑥 들어갔다. 머릿수로 막아 놓은 방호벽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들을 대하는 그의 말투와 행동은, 마치 말랑한 곰 인형 들을 앉혀놓고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는 듯했다. 사람 다 거기서 거긴데 쓸데없이 모여서 편 가르고 대단한 척한다는 비웃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 아이는, 저런 삼촌 옆에 있으면 누구도 자신을 쉽게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자신에게, 오가다 마주치면 밥 먹었냐는 등 소소한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의 말과 표정에선 진심이 묻어 나왔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와 함께 있으면 평소에 본척만척하던 사람도 아는 척을 해왔다. 아이는 기분이 좋았고, 그는 씁쓸하게도 사람들 내면의 심리를 엿보았다.



그는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 자신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남에게 의지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게다가 무조건 양보하고 배려하고 낮추면 무시당한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게끔 허용하면 안 된다. 자신의 부모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주눅 들어 있었다.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남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자신이 이야기하면 건성으로 듣는 모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다. 그 아이의 생각처럼, 사람들은 원치 않는 상황이 만들어질 때 마지못해 상대해주는 것뿐이었다. 말도 더듬거리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바보와 친하게 지내면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서다.

 


맞다, 그 아이는 의학적으로도 바보였다. 자폐와 정상인 경계에 서 있고 분노조절장애와 우울증도 있었다. 오랜 시간 억눌린 감정이 발산되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다.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려서는 공부도 곧 잘하고 밝고 명랑했다. 그 아버지는 욕심이 났다. 다그치고 지적하고 성과에 못 미치면 남과 비교하고 야단쳤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미움도 함께 커져 같고 아이는 점점 작아졌다. 결국,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이는 아버지를 피해 자신의 안으로 숨었다.



어느 날이었다. 자신이 병신이라서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하며 울었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그 아이는 짝사랑하는 고교 동창 여자아이를 만나 그녀와 남자 친구와 있었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밤새워 들어줬고 위로해줬다. 가뜩이나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없어 보이는데, 그날은 사람들에게 대놓고 지적질까지 당했다. 급기야, 참고 참다 터져버린 것이다. 대다수가, 착한 사람은 이해심 많고 감정도 빠르게 희석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로받는 게 아니라 위로를 주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본인들만 시원하다면 제삼자와 있던 거칠고 날카로운 감정의 쓰레기를 모두 쏟아낸다. 여기서 다치는 사람은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 언제나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는 결국 떠나가고,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낸 착한 사람은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서 남는다. 그는 폭풍 치는 감정에 끼어들지 않고 바라봤다.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한다.



그가 집단을 떠날 때가 됐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냈고 보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죄송하다'라고 하지 말고 '제가'를 '내가'로 바꿔 말하라고 했다. 아이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말했다.


"삼촌도 오래전에 너와 같았단다"


그 아이가 과도한 사랑의 뜨거운 학대였다면 그는 냉소와 차별의 차가운 학대였다. 그는 지옥에서 살았으나 자신은 지옥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엉성한 말투와 장난기 가득한 표정 그리고 별을 바라보는 소년의 숨겨진 마음은 지독한 몸부림이었다. 훗날, 그도 부모가 됐다. 그는 자신의 두 아이를 작심하고 웃음으로 키웠다. 그의 아이들은 자유롭고 당당하다. 아빠인 그에게 툭하면 '아니오'라고 한다. 그도 그때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했다. 왜, 자신과 같은 쓸모없는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이유를 찾아냈다. 그가 그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처럼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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