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름'은 열아홉 살 된 무슬림 여자 아이다. 그가 추억하는 그녀는 사막을 가로질러 거칠게 흐르는 강가에 살았고, 이야기를 재미나게 했고, 깊은 눈동자를 가졌다.
그가 낮게 선회하는 비행기 창을 통해 내려다본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도시의 경관은 허무했다. 오랜 혼란으로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허물어졌다. 착륙 후, 국제공항답지 않게 별도의 연결 통로가 없었다. 입국 게이트까지 오십여 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이글거리는 태양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저기 보이는 입국장 안은 당연히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단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실내에는 천장에 매달린 두 대의 선풍기가 더위에 지친 듯 힘겹게 돌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 뭐를 팔겠다고, 이틀에 걸쳐 비행기를 갈아타고 왔는지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주로 M 호텔에 묵었고, 항상 슈퍼 싱글 침대가 두 개가 있는 투 베드 룸을 원했다. 워낙 자주 묵다 보니 가끔 일반 객실이 부족할 경우 스위트룸을 할인된 금액으로 쓸 수 있고, 시차를 두고 찾아오는 바이어들과 침대 위에 샘플을 늘어놓고 상담하기 편해서다.
저녁이 되자 첫 번째 바이어인 와지드가 그를 찾아왔다. 호텔 옆 공터에서 하는 사촌 혼례식 피로연에 가자고 했다. 그가 도착할 때부터 들리던 흥겨운 음악 소리는 그곳에서 난 것이었다. 그는 이슬람 전통 혼례식에 흥미를 느꼈다. 와지드는 그와 나란히 걸으며, 그 나라 최고의 부자 중의 하나인 사촌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속으론 오죽 못났으면 사촌 자랑할까 싶었지만, 겉으론 듣는 척했다. 혼례식은 벌써 한 달 전에 했단다. 그리고 피로연을 한 달씩 하는 것이었고 그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상상한, 모두에게 축복받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라딘과 지스민의 혼례식이 아니었다. 무장한 경비원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곳은 특권층만 참여할 수 있는 장소였다. 대다수 국민들이 지붕도 없는 흙벽돌로 지은 집에서 살고 한 끼가 아쉽다. 널따란 공터에 밤의 조명과 빙 둘러쳐진 하얀 천막들, 노래와 춤 그리고 넘쳐나는 호텔 뷔페 음식은 자신들이 얼마나 이 나라에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었다. 이슬람 국가에선 공식적으로 술과 여자는 금기다. 그러나 그곳에는 버젓이 둘 다 있었다. 성경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만 꼭 지켜야 하는 것처럼 코란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해외와 전국에서 몰려온 부잣집 도련님들의 끼리끼리 파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낀 것은 부자와 빈자의 경계가 이렇듯 선명하게 나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밤 10시가 가까워졌다. 그는 지루한 표정을 하고 연신 짜이(홍차에 우유를 섞은 것)만 들이켰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와지드가 그의 뒤편을 향해서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의문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천막 안쪽, 약간 술에 취한 듯한 여자와 그녀를 부축하듯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히잡을 쓴 여자가 보였다. 그녀들은 별 볼 일 없는 손짓 하나에 꼭두각시 인형처럼 스르륵 끌려 나왔다. 그리고 와지드가 다시 지시하자 양편에 각각 앉았다. 중세시대의 예쁜 여자 시녀와 음험한 남자 주인이 나오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던 이성은 빠르게 흩어지고 감성이 차올랐다. 차마 미안해서, 옆에 앉아 있는 여자라기보다 아이에 가까운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는 짜이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번엔 그녀가 그의 찻잔에 짜이를 채워주었다.
그는 따라준 짜이를 말없이 마시고 피곤하다며 호텔로 돌아왔다. 밤 11시가 넘자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려한 파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가끔 친구라고 찾아오던 바보 소년에게 '**야, 조금만 기다려' 하면서 손님과 짧은 관계를 맺으러 간 용감한 척하던 창녀가 떠올랐다. 답답함이 그를 괴롭혔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니 이곳은 도시에서도 별이 보였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호텔 밖은 위험하지만, 조명등이 켜져 있는 정원은 괜찮다는 생각에 객실을 벗어났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말하지 않은 상황까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 나라의 대도시는 그렇지 않지만, 자치지역은 달랐다.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별도의 통금 시간이 있었다. 그녀들은 도시와 떨어진 변두리 자치지역에 살고 그곳의 통금 시간은 밤 10시였다. 그녀는 우리 나이로 열아홉 살 된 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공장도 서비스업종도 전무한 나라에서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하다. 이런 나라에서 가난한 집 여자아이가 학비와 경비를 충당하려면 하나밖에 없다. 파티에 나가는 것이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남다른 외모를 갖춘 닐름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언니를 쫓아 몇 번 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없었다. 부유한 남자 파트너를 온종일 상대해 주고 수고비를 얻어 빨리 돌아가거나 잠자리를 해야 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술 취한 남자 파트너는 사라지고 자신들만 남았다. 집으로 갈 수도, 거리에서 잘 수도 없었다. 자치지역의 경찰들 또한 수컷들이고, 거리의 부랑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밤새 여러 남자를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곳은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다. 친족에 의한 명예살인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초조함이 그것을 말해줬다.
사막의 밤은 몹시 춥다. 그는 함께 들어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고 호텔 직원들 또한 수컷과 다름없다고 여겨서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이 동양의 남자와 하룻밤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따라 객실로 들어오자 술 취한 언니부터 한쪽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처분을 기다리듯 침대 모서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분명히 먼저 씻고 나오라고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날은 모든 것이 빗나가는 날이었다. 그는 다른 객실을 구해서 자겠다고 하며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기다려 달라는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렸다.
그는 밤늦도록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어를 썩 잘하지 못하는 그는 듣는 것이 편안하기도 했지만, 그보단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가 이야기하면, 그는 칼리프가 천일야화를 듣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그녀가 사는 마을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눈빛마저 몽롱해졌다. 닐름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한다고 여겼다. 그녀가 사는 곳은 히말라야의 세찬 바람이 불고, 눈 녹은 물이 거칠게 흐르는 강가다. 그 강물로 사람들은 빨래도, 목욕도 그리고 마시기도 한다고 했다. 그녀의 마을서는 만년설이 보였고, 밤에는 별이 쏟아지고, 아침엔 새가 지저귀는 곳이었다.
사막의 해는 유난히 빨리 뜬다. 이른 새벽임에도 밖은 환했다. 잠에선 깨어난 그녀들은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매춘이 금지된 나라다. 호텔을 나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누군가 볼 수도 있다. 그는 지난밤 구하지 못한 객실 요금만큼의 달러를 그녀에게 쥐여주며 처음처럼 '안녕'이라고 밝게 인사했다. 닐름은 그가 건네준 달러를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꼭 쥐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으로부터 반짝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본명이 '조하'라고 알려줬다. 그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닐름은 그의 미소에서 천진난만한 소년을 보았는지 'boy'라는 외마디를 뱉었다. 이제 그녀는 가야 했다. "앗쌀라무 알라이쿰 와 라흐마 툴라 히 와바라 카트 후 (당신에게 평화와 신의 자비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이라는 말과 함께 그를 가볍게 포옹하며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고 떠났다.
그는 알고 있다. 닐름이 살고 있는 거친 사막과 회색의 강처럼 그녀의 인생도 험난할 것임을. 그 또한 그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가야 한다. 그가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수컷들과 추위를 피할 하룻밤도, 돈도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순백의 순수함이다. 그것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한지 사람들은 모른다. 결국, 죽을 때 돼서야 후회한다. 그가 겪어온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그것만 지니고 있으면 항상 풍요롭고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그가 닐름을 만난 지 20여 년이 흘렀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항상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바람, 눈, 강물, 별 새소리 등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서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의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듯 소환하며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