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Sep 30. 2020

행복하기보다  불행을 끊어 내는 게 먼저다



내가 아는 그는 오만한 사람이다. 가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마주쳐도 그런가 보다 한다. 그의 유일한 관점은 자유로운가 아닌가에 맞춰져 있다. 대단하다는 것은 오롯이 타인의 관점이다. 본인이 흥미롭지 않다면 시큰둥한다. 하기야, 그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어려서 잘하는 게 없었다. 공부, 노래, 그림, 친구 관계까지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낙제아였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있다면 혼자 행복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올망졸망한 아이가 2년 터울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춤이라도 출 듯 기뻤다. 그토록 원하던 완벽한 가족이 생겼다. 아빠, 엄마, 아들, 딸이다. 물론, 그가 법률적 가족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성적이 바닥이었던 그였다. 두 아이를 명문대를 보내고 '사'자 들어간 직업인을 만들려는 욕망은 애초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두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것인가를 답답해했다.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경험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복한 상상을 서너 살 된 두 아이에게 설명해 준다는 것도 무리였다. 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냈다. 모르는 낯선 행복은 제쳐두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불행을 제거해 주기로 했다. 모르고 낯선 것보다 잘 아는 것을 하는 게 맞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두 아이는 24, 22살이 됐다. 아들 녀석은 게임을, 딸아이는 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배고프면 만들거나 시켜 먹는다. 집안 생활이 다 그렇다. 대충 입고 아무렇게나 누워있다. 아빠인 그와 재밌게 놀고 친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는 가방을 메고 나간다. 산골에 있지 않고 서울에 머무를 때면 카페로 향한다. 두 아이 나름의 놀이가 있듯 그도 자신만의 놀이문화가 있다. 그가 그 프랜차이즈 카페를 자주 찾는 이유는 사람이 많아서다. 호텔 1층에 있고 주차장 넓다. 그는 걸어서 가지만 주차가 편리해서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 표정을 은근슬쩍 살피고 엿듣기 놀이를 한다. 훔쳐보쾌락을 느끼는 관음증에 걸린 게 아니다. 가만있어도 보이고 사방에서 들다. 주어진 조건을 그냥 즐기는 것뿐이다. 그러다 지루하면 좀 전에 그들로부터 얻은 느낌을  옮긴다. 글이란 사람이 사람을 쓰는 행위다. 방구석든 카페든 그들 속에 섞이고 숨 쉬써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 사람들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대체로, 너무 크고 무겁고 시끄럽다. [제발, 통화는 밖에 나가서 했으면 좋겠다.]는 이 문장도 방금 뒷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는 카페에 오래 머무른다. 그렇다고 양심 없이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테이블을 온종일 차지할 만큼 염치없지 않다. V.I.P답게 대가를 지불한다. 하긴 집에 있어 봐야, 금지옥엽에 천상의 빛 같은 지체 높은 딸아이에게 시달릴 뿐이다. 그녀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밥 차려 달라, 물 가져와라,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징징거린다. 가끔은 욕실에서 '빤쮸!'라고 소리친다. 갈아입을 팬티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 아빠가 필요할 때마다 그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다. 중학교 때까지 아빠는 그녀의 신발을 신겨줬다.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고치려 하지도 원치도 않는 부녀간이다. 분위기로 봐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갈 것 같다. 뭔 걱정인가, 그땐 아빠도 없는데, 이 짓도 머지않아 끝날 텐데 라고 편하게 생각한다.


반면에 오빠는 여동생과는 다르게 깔끔남이다. 항상 정돈돼 있어야 하고, 준비성 있다. 아빠를 닮아 요리도 잘한다. 아들은 나무늘보보다 한참 느린 여동생을 한심하게 여긴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오매불망 애지중지하는 그에게 불만이 많다. 툭하면, 아빠가 그러니까 애가 저 나이 되도록 버릇없다고 한다. 딸아이가 제방 침대에 누워 아도크림 이라고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그러면 아빠와 아들은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아들이 냉장고를 가로막고 있다. 그때부터 철벽 방어막을 뚫으려는 아빠와 신념을 지키려는 아들과 치열한 몸싸움이 시작된다. 요즘은 나이를 먹었는지 속도와 몸싸움 어느 것도 아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는 제 방 침대에 멀거니 누워 아이스크림만 기다리는 가여운 딸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아픔의 크기는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얼마나 먹고 싶을까. 막아선 아들이 극도로 미워진다. 그는, 아빠 마음도 몰라주는 불효자식에 나쁜 놈이라고 푸념을 해 댄다. 웬만하면, 축 처져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를 본다면 양보라도 할 법하다. 그러나 버르장머리에 싸가지없는 뻔뻔한 아들놈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자신은 버르장머리 없고, 불효자식에 나쁜 놈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대든다. 웃기지도 않는다, 아빠가 자기 딸 예뻐하는데 아들이 왜 끼어드는지 알 수 없다. 애들 엄마는, 저 둘은 원래 그러느니 한다.


그는 두 아이에게 관습적 예의범절을 가르치지 않았다. 마치, 격식에 따라 차려 놓는 제상 음식 같아서다. 보이는 형식의 고상함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다. 예절 대신 배려를 가르쳤다. 미안하게도, 두 아이는 어른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다. 자기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한다. 아빠인 그가 바람막이를 해줘서다. 그는 사람은 수평적 관계라는 불변의 법칙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 대상이 부모, 친지, 선생님, 상급자, 부부, 연인이든 일방적 지시의 관계는 억압이다.


작년이었다, 아들이 제대를 얼마 앞두고 외가에 갔다. 점심에는 좋아하는 순대 볶음을 먹고 귀대하고 싶었다. 할머니가 상을 차려주자 생각 없다 하고는 혼자 나가서 사 먹었다. 할머니는 그것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큰 딸인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는 귀대하는 오빠도 엄마도 아닌 그의 딸아이에게 전화했다.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가 차려준 음식인데 그래서야 하겠냐고 구구절절 말했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오빠에게 주의를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집안의 홍일점 조카딸이고 어려서부터 물심양면 챙겨준 이모가 하는 말이다. 듣고 '네' 하면서 전할 줄 알았나 보다. 이모의 기대감은 단번에 깨졌다. "왜, 나를 통해 아빠가 해야 하죠, 이모가 직접 오빠에게 하세요!"라고 차가움을 풀풀 풍기며 말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욱했다. 밥 한 끼 안 먹은 일로 할머니, 이모, 본인으로 이어지고 아빠는 또다시 당사자인 오빠에게 해야 한다. 전달하는 순서도 외우기 힘들 만큼 복잡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위계 체계를 공고히 하려고 난리를 피는 기성세대에 반항한 것이다. 이모는 얼마 전 다른 일로 오빠에게 '아니오' 소리를 듣더니, 이번엔 귀엽고 사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던 조카딸에게 들었다. 오지랖 넓고 평범한 기성세대의 이모는 멘털이 붕괴됐다. 13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두 아이는 전혀 딴사람이 됐다. 그녀는 이모와 통화를 마치고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이 어른에게 심했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녀는 촌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로 조심스럽게 이실직고했다. 그는 다 듣고 말했다.


"아빠는, 너희가 부드럽고 요령 없이 말한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은 할 말을 못 하는 것이라 생각한단다. 그러면 평생 굽신거리고 살아야 한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말하는 법은 알아서 배워라... 그리고 잘 못 하지 않은 일로 사과하지 마라, 습관 된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지켜줬다. 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교장 신부님에게 말실수했어도 똑같이 얘기했다. 정말, 어른이라면 내용을 들어야지 미성숙한 청소년기 아이의 부족한 과정을 트집 잡아서는 안 된다. 많이들 착각한다, 어른 말에 토 달지 않고 인사성 바른 아이가 사회생활 잘하고 성공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논리고 봉건, 식민, 군사 문화의 뿌리 깊은 잔재다. 쉽게 말해, 생각하지도 떠들지도 말고 무조건 복종하라는 소리다. 조용한 사회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고, 말 없는 가족은 오해가 모래알처럼 쌓이다 흩어진다.


강요된 관습에 얽매이고 형식에 순응하고 살다 가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밖에 안 된다. 이렇게 예의 바르고 빈틈없어 보이는 대부분의 바른생활 추종자들은 습관적으로 형식에 집착한다. 형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영역을 확장해 간다. 결국엔 삶의 전반을 지배한다. 그러나 순응에 길든 정신은 받아 들기만 할 뿐 저항하지 않는다. 급기야, 모든 것을 익숙한 형식이란 틀 안에 집어넣는다. 고급차와 부동산, 주식, 직업, 학벌이 미덕이라는 새로운 관습을 만든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이분법이다. 더 가졌으면 행복하고 덜 가졌으면 불행하다. 그들은 그것이 성공이고 행복이라 착각한다. 천만에, AI처럼 시스템화 됐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한 형식의 시스템은 외적 변화에 무척 취약하다. 지금의 성공이 그때의 성공이 아니다.


우선은 체면치레로 인해 결정 장해가 온다. 배고픈데 배부른 척하고, 불편한데 편한 척한다. 앞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들이 가니까 본인도 간다. 배움과는 상관없다. 유학을 하고, 명문대를 나오고, 철밥통 기업에 취직해도 항상 부족하다고 여긴다. 시스템 내부의 소프트웨어가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어 끝없이 욕망한다. 어떨 때는 위기를 모면하거나, 알량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변칙을 쓴다. 그러다 한순간에 쪼개지듯 허물어진다.


다음은 감성과 상상력을 거세시킨다. 본인과 가족에게는 끔찍한 일이다. 그들의 말은, 어쩜 그렇게 꼭 맞아 들어가고 매끄러운지 마치 기계 같다. 입으로는 책 속의 멋진 문장을 말하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은 빠져있다. 인류의 부족한 과학 기술로는 아직까지 AI에게 상상력을 넣어 줄 수없다. 그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전부가 베스트셀러다. 단순히 읽고 멋지게 말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과 유명인들의 약력과 문장을 몽땅 외우고 다닌 들 본인이 훌륭하게 되거나 유명해지지 않는다. 남의 말 열심히 옮겨봐야 초라해질 뿐이다. 암기력에도 한계가 있다, 매번 그 말이 그 말이다. 점점 볼품없어진다. 이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한다고 했던 얄팍한 사람은 성격 차이라는 값싼 기계적 핑계를 대고 더 나은 AI에게로 자리를 옮긴다. 차라리, 처음부터 어리숙하고 부족해 보여도 자기 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것이 낫다. 그러면 최소한 얄팍한 사람은 꼬이지 않는다.


사람은 간사하고 세상은 다변한다. 모두가 외적 요인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누가 IMF나 전염병 팬데믹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얼마 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으로 학교와 학원을 못 보내 걱정하는 부모들에 대한 기사를 봤다. 학교는 그럴 수도 있다지만 학원은 왜 나올까 싶다. 이것도 새롭게 관습화 된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의 아들은 한심하다는 듯  "학교 일 이 년 안 간다고 인생 변하지 않아."라고 했다. 하기야, 그 정도의 외적 요인으로 인해 삶의 중심이 틀어진다면 무엇인들 할 수 있을까.


그는 두 아이를 관습과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라나게 하고 싶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관습과 형식이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는 관습을 절대 윤리로 둔갑시켜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한다. 그가 오랜 시간 그들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 또한 윤리로 여겨서다. 그는 40대에 많이 아픈 적이 있었다. 독한 마음으로 지나온 날의 경험을 끄집어냈다. 매번 추억이라 하지 않고 경험이라 하는 것은 추억에는 애잔함이 끼어들어서다. 그래서는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때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이대로 앓다가 죽는다면, 그들로부터 대놓고 무시당하는 어린 두 남매와 아내는 싫건 좋건 의지하고 휘둘릴 것이다. 과거의 자신처럼 위해주는 척하며 순응하는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이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사람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통제하기 위해, 권위를 내세워 두 아이의 날개부터 꺾어 놓을 것이다. 꺾인 날개로는 날 수 없다.


그는 끊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자신의 두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교대로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낡은 관습과 형식은 어떻게든 이 아빠가 다 끊어 놓으마 너희는 훨훨 날아라.' 그것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식을 치르는 행위였다.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지만 그보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두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어차피 정도 없는데, 관습적으로 왕래하며 지낼 필요도 없었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배려가 없이 특정인들의 이기적 욕구를 해소해 주는 관습은 그 자체가 폭력이자 불행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불행을 끊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을 뿐이다.


관습과 형식에서 벗어나 맘껏 상상하고 자유롭게 자란 그의 두 아이는 독립심과 자존감이 무척 강하다. 집에서는 버릇없지만, 밖에 나가선 정반대다. 자신들의 자유가 중요하듯 타인의 자유도 존중한다. 가르쳐준 적이 없음에도 존댓말을 한다. 다소 부족한 친구가 있으면 옆에 있어 준다. 간혹, 관습을 무기 삼아 제 앞가림도 못하는 기성세대와 부딪치기도 한다. 잃을 것도 없고, 미숙하고 때로는 싸가지없는 게 젊음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두 아이는 과거가 아닌 지금의 아빠를 닮았다.


두 아이의 삶의 미천은 자유로움 속에서 나온 무한한 상상력 이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했다. 대학과 학원에 다니면서도 손 벌리지 않는다. 어려서 학원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용돈을 주지 않기에 장학금과 알바로 학비와 용돈을 해결한다. 게다가 한 달에 10만 원씩 생활비도 내야 한다. 그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은 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불행은 끊어 주었다. 가정은 탓하는 곳이 아니라 따듯하게 위로받고 치유하는 장소다. 두 아이는 햇살처럼 활짝 웃으며 자랐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공은 상대적이다. 모든 것에 낙제아 였던 그에게는 대단히 큰 성공이다. 두 아이의 미래는 아빠인 그도 모른다. 그것은 철저히 본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빠로서 책임을 다했기에 누구 앞에서도 오만할 수 있다. 이제는 두 아이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가슴 졸여 바라보며 그만의 삶을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