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왕 Sep 29. 2021

택배를 빨리 받는 방법

친구가 연애 고민상담을 해왔다.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상담을 해주겠다고 한 적이 없고, 그녀 또한 교활하게 밥 약속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다짜고짜 고민을 털어놓은 거니까 ‘납치 상담’ 혹은 ‘기습 상담’을 당했다고 해야 맞겠다. 어쩐지 평일 저녁부터 술과 고기를 사겠다고 하는 모양새가 영 수상했는데, 역시 잘못 걸렸구나. 세상에 ‘엥? 갑자기?’-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노폿집에 마주 앉아 오겹살과 소주를 주문하고 때마침 겹살이 딱 알맞게 익어서 입에 한 점 넣으려는 순간- “야 근데 있잖아 나 철수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얘기를 꺼내길래 ‘아뿔싸! 이게 본론이었구나’ 했다.


친구 관계에서 갑과 을은 대게 누가 밥을 사느냐에 따라 바뀐다. 그날 나는 ‘을’이었으므로 꼼짝없이 이 지난한 연애 얘기듣고 있어야만 했다. 어딜 가든 밥값은 하자는 주의의, 지나치게 성실한 타입이었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세이경청했다. 오겹살이 아니라 삼겹살이었으면 조금 건성으로 들었을 텐데... 어쨌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그녀에게 내 의견을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넌 내가 봤을 땐 금사빠야"

친구의 연애상담을 듣고 철저하게 분석한 후 내린 나의 결론이었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그간의 빅데이터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라 신뢰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뿌듯해했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 다르거든!"

그녀가 앙칼지게 받아친다. 앙칼지다는 게 뭔지 감이 안 잡힌다면 이 장면을 영상으로 담아 시청각 자료로 사용하고 싶을 정도다. 아마 퓰리쳐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근데 동영상도 퓰리쳐 상을 주던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보고 문득 미안해진 나는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에뉘예~ 이붠엔 쥔쫘 돠류겨듄~~"


순간 테이블 접시 위에 놓여있어야 할 상추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듄~ 하는 마지막 음절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한 그녀의 투척 동작이 유려하기까지 하다.


철썩-!


수분을 가득 머금은 국내산 유기농 상추가 날아와서 내 얼굴에 무료로 팩을 해줬다. 사실 유기농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메뉴판 원산지 표기에는 분명 상추: 국내산이라고 되어있던 걸 봤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로 슬쩍 곁눈질하는 걸 보고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맞은 것도 난데 눈치 봐야 하는 것도 왜 나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대한민국은 피해자들이 더 눈치를 보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있다. 머쓱한 마음과 달리 내 손은 떨어지는 상추를 번개처럼 낚아채서 입에 욱여넣었다. 위생에도 아무 문제없을 거다 아마도. 예전에, 31가지 맛을 판다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는데(실제로는 한 번도 세어본 적 없지만), 한 친구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2단으로 쌓아 올리는 콘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먹다가 위에 있던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테이블로 떨어뜨렸다. 그걸 얼른 손으로 주워서 다시 올리길래 다소 불결하게 바라봤는데, 친구가 말했다.


'야야 3초 안에 주우면 괜찮아’


아하-! 명문 대학 식품공학과 친구의 말이니 안심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얼굴에 맞았던 상추를 먹는 것 정도는 걱정 없다.


어쨌든, 다시 그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는 넉 달째 짝사랑 중이다. 자기 말로는 썸이라고 하는데, 글쎄? 요샌 속으로만 일방통행 하는 것도 썸이라고 하던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올해에도 한 스무 명 정도와 질펀하게 썸을 탔는데 말이다. 썸 전문가인 내가 말하자면 그건 그냥 그녀의 착각에 불과한다. 심리학 전문 용어로는 Kim-Chi-Guck Drinking이라고 한다.


그녀의 짝사랑 상대인 철수는 나도 모임에서 종종 봤던 친구라서 알고 있다, 연영과 출신에 잘생기고 키도 훤칠하다. 그녀는 몇 번 같이 놀다 보니 철수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말도 잘 통하고, 이제 막 사회 첫발을 내디딘 사회초년생끼리 유대감도 형성되고 그랬다나... 근데 그런 식으로 철수와 일방적인 유대감을 쌓은 여자들이 아마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는 될 거다. 아무튼 결정타는 둘이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러 가고 나서다. 내 친구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눈이 별처럼 빛날 수도 있구나' 싶었단다. 공연 무대를 바라보는 철수의 눈이 꼭 그랬다고 했다. 뮤지컬 보러 가서 옆 사람 얼굴만 뚫어지게 봤다는 것부터가 결정타 같은데 자꾸 이상한 낭만을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그날 철수가 자신을 집에 바래다주고 웃는 모습에서 분명 강렬한 썸을 인지했다고...


'그럼 조선 팔도에 인상 쓰고 바래다주는 놈도 있니? 그리고 너네 원래 집 같은 방향이잖아?'-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한껏 핑크빛에 취해있는 친구의 로맨스를 초치기 싫어서 꾹 참았다. 이게 불과 몇 달 전 이야기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과 썸을 타고 있는(본인 피셜) 철수가 근래에 다른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리며 공연 예술을 즐기러 다닌단다. 그걸 자기한테 말도 안 해준 것이 못내 서운했는데, 며칠 전엔 자신과는 한 번도 찍지 않았던 사진을 다른 무리들(이성 포함) 과는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다는 것이 그녀의 화약고에 불이 붙은 이유다.


"그냥... 뭐랄까 배신감 느껴 나 어장 당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배신?’ 비싼 소주를 뿜어가며 웃을 뻔했다. 뭐 마실 때 웃기는 건 정말 노매너다. 썸 전문가인 내가 보자면 철수는 그녀를 배신한 게 아니다. 당사자들끼리 느낀 긴밀한 감정이야 모르지만, 그가 어장관리 같은 걸 할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성적인 성격이고 무덤덤한 성격에 더 가깝던 걸? 이건 내가 볼 땐 일방적인 그녀의 기대감이다. 그쯤 했으면 알 것도 같은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꼭 술에 취한 사람 같아서 자기가 얼마나 비틀거리며 걷는지 모른다. 자기는 똑바로 걷고 있는 줄 아는 거다.


"나도 알아, 그 사람 마음에 내 자리가 많지 않다는 거... 그래도 기다리면 언젠가 걔도 나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아무 말 안 하고 그녀를 슬쩍 쳐다만 봤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대개 오지 않는다. 기다리기 때문에 오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지기 때문이다. 기다려 봐서 안다. 그땐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것 밖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줄여 줄 방법은 잠시 사랑하지 않는 법 밖에 없다. 우리가 택배를 빨리 받는 방법은, 주문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법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며 훌쩍이던 그녀가 별안간 내게 소리 지른다.


"너 또 저번처럼 기다리는 건 안 온다느니, 어쩌고 저쩌고 개소리하려고 입이 근질근질 하지?!"


순간 정말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분명 궁예의 환생일 것이다. 지금이 후삼국시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내 뚝배기는 금군의 철퇴에 의해 으깨졌을 테니까 말이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나를 보다가 이윽고 그녀가 자기 앞에 있는 술잔을 한 번에 비운다. 그리고 덧붙인다.


"야 그럼 오지 않은 걸 기다리지 온 걸 기다리냐"


아... 난 그날 그 말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사랑의 고수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보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도 낙산공원에 갈 걸 그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