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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Oct 08. 2021

펜을 슬쩍 제자리에 놓고 나올 수 있을까



군산에 갔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친구와 같이 한 번 와봤고, 혼자서 온 건 두 번 째다.


처음 군산 흙을 밟은 건 2017년 겨울에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친구와 여행 갈 곳을 정하는데, 검색만 잔뜩 하고 끝내 못 고르다가 ‘다트 던지기’로 정해진 곳이 바로 군산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벽에 지도를 놓고 다트를 던져서 꽂힌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어디로 갈지 평범하게 정할 땐 허무주의에 빠진 남자들 같더니, '운에 맡기자'는 얘기를 듣자마자 눈을 빛내며 모험심을 불태웠다. 여행 전체를 놓고 봐도 여행지 고르던 이때가 제일 설렜던 것 같다.


우린 A4 용지에 전국지도를 프린트 한 뒤에 벽면에 붙였다. 경건하게 빨간색 다트를 하나 집어 들고 친구에게 물었다.


"야 남자답게 딱 한 번이다?, 가봤던 데 걸렸다고 다시 하자고 하기 없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마왕아... 나는 무르기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야, 얼른 ㄱㄱ"


바로 오늘 점심 메뉴도 돈가스 먹자고 했다가 짜장면 먹자 번복했던 친구의 행동이 생각났지만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고 다트를 날렸다.


"간다ㅇ아ㅏㅏㅏㅏㅏㅏㅏ앗!!!"


쇽- 하고 다트가 찍힌 곳을 살펴보니 군산이었다. 심지어 너무 정확히 군산의 중앙에 꽂혀서 놀랐다.


근데 지금 돌이켜 보면 천만다행인 것이, 그때 다트판을 아무 생각 없이 준비하는 바람에 북한도 포함된 한반도 전체 지도를 뽑아왔는데, 38선 이북 쪽으로 걸렸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걸린 곳이 함경도 원산이 아니라 전라도 군산이라 참 다행이었다. (심지어 그땐 이상한 줄도 몰랐다.)




우리의  군산행 시기 마침 군산대교(군산-선유도를 이어주는 다리)가 거의 완공되던 무렵이었다. 내비게이션만 찍고 무작정 가던 우린 그날 운 좋게도 사람 하나 없 뻥 뚫린 ‘미개통 고군산 대교’를 마음껏 달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딱히 억눌 마음이 있지도 않았는데 해방감 비슷한 걸 느꼈던 것 같다. 묘하게 상쾌했던 기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날 고군산 대교에서 느꼈던 산뜻함 뿐만 아니라, 군산 곳곳의 좋은 분위기와 썩 마음에 들었던 식당 같은 것들이 내 마음 한편에서 잘 버무려진 덕분에 이 곳을 몇 번 더 찾아갔다.



난 종종 여행을 혼자 가곤 하는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알리진 않는다. ‘왜 혼자가?’ 라거나 ‘친없찐?’의 반응이 고스란히 상상되기 때문이다. 고독할지언정 놀림감이 될 순 없지!


요즘 sns를 통해서 보면 혼자 여행 가는 사람이 많은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혼행을 가보면 생각만큼 혼자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나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혼자서 왔는지, 연인끼리 왔는지, 친구들끼리 왔는지 알아채는 것은 혼자 여행을 가봐야 더 잘 관찰된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게 되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인원 구성으로 왔는지 까진 살펴보지 않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뭘 가득 쥐고 있어야 남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옆에 아무것도 없어야 비로소 둘러보게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혼자 여행 때 밤거리를 걷다가 단톡방 등에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밤 길이 유독 쓸쓸한 것 같다'며 지레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 텅 빈 밤거리를 혼자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게 썩 좋았다.


롱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스치는 이어폰 느낌도 좋고,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 폐부까지 느껴지는 이 서늘하리만치 선선한 공기엔 왠지 미세먼지도 없을 것 같아서 좋았다. (그땐 코로나 시국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불과 몇 초 전 보았던 거리의 모습이 그대로 다시 보인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를 안정감 다정함을 느낀다. 맘이 포근해졌다.


사람이 많을 땐 잠깐 한눈 팔면 시시각각 변해버리던 거리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어쩌면 그 변화무쌍한 거리 말고 이게 진짜 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텅 빈 거리를 볼 때, 이 거리도 나를 본다. 서로 비슷한 것들끼리 마주 보는 느낌이다. 내가 거리를 째로 빌린 기분이라고 느꼈을 때 이 거리도 나를 독차지.




발길 닿는 데로 길을 걷다, 카페 앞에 웬 검은 천을 뒤집어 쓰고 있는 물체를 보았다. 귀신인가?! 자세히 보니 가오나시 입간판이다


'어우 씨 깜짝이야!'


이런 데서 가오나시를 만날 줄이야...



가오나시를 보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치행)의 주인공 '센'을 닮았던 내 짝사랑녀다.


예전에 친구와 대만 여행을 갔을 때, 여행 코스로 반드시 지우펀(지역 이름)이 포함되어있는 패키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거기가 센치행의 모티브가 된 동네이기 때문에 관광상품으로 센의 피규어를 팔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고, 그걸 그 애한테 사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만 여행은 지우펀 관광이 포함된 상품으로 골라서 갔고, 지우펀에 도착한 나는 그 짧은 자유관광 시간 동안 기념품 가게를 문자 그대로 이 잡듯 뒤졌다.


왜 자꾸 기념품 가게만 들락거리냐는 친구의 흉신악살 같은 얼굴을 모른 척하고 이 가게 저 가게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대만 여행 중에선 지우펀이 젤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아니 근데 센치행 때문에 뜬 관광특구면 솔직히 전 등장인물 기념품은 기본으로 다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온통 가오나시뿐이었다.


저 검은유령놈 인기 때문에 결국 센 피규어는 못 샀다.


그때 지우펀을 내려오면서 아쉬운 대로 가오나시 얼굴이 뚜껑으로 된 새카만 펜을 두 개 샀다. 그 애에게 선물하면서도 마음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대만 여행은 끝났고, 펜을 선물하던 나도, 그 고생담을 웃으며 들어주던 그녀도 이제 다 지나간 시절이지만. 문득 생각해 보곤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나는 나 같이 또 지우펀 가게를 온통 뒤지고 다닐까? 아니면 이젠 한 숨 돌리고 지우펀 경치를 구경하게 될까? 비 오던 지우펀이라 더 운치 있었는데...


우산을 쓰면 뛰어다니는데 불편할 것 같아서 그냥 비를 맞으면서 사람들 사이를 잽싸게 누비던 나.


돌아가면 우산도 쓰고, 빗방울도 보면서 천천히 걷게 될까?


센이 없어서 맘 졸이던 나.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가오나시라도 사 왔던 나.

돌아가면 그냥 쓴웃음 한 번 짓고 펜을 슬쩍 제자리에 놓고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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