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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김춘식 Dec 12. 2020

무당이 무서웠다.

사랑과 영혼

칼춤을 추고 칼을 던졌다. 칼이 마당에 꼽혀 서야 병이 물리쳐진다 했다. 칼이 마당에 설리가 없다. 그렇게 병마와 싸우다 서른 초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부쥐와 무당 이야기다. 암이란 병마를 알 수가 없었던 시골이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고 철이든 후 암인 줄 알게 되었고, 칼이 마당에 서더라도 병을 고칠 수 없었다는 것도 알았다.


마지막 절박함에 몰린 사람들이 의지 할 수 있을 만큼의 의료 서비스를 기대할 시대가 아니어서 굿판은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절박했던 순간의 일들이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았다. 무당굿과 엑스레이 필름, 둘은 평생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워 왔다.


작년 출장 중 L에게 연락했다. 소주와 적당한 음주를 좋아하는 지라 연락하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선약이 있다고 극구 갈 수 없다 한다. 평소 그럴 L이 아닌데 말이다. 용한 무당과의 예약이란다. 놀랐다.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했더니 용해 사람이 밀려 언제 끝날 지 모른다 했다.


브런치 김*연 작가님의 무당에 관한 글을 읽었다. L이나 김 작가님의 글에는 무당이라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없고 친숙하게 즐기는 듯했다. 이때까지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일상처럼 보이고 옛날에 느꼈던 절박함도 없고 편안해 보였다.


L은 이번 신년에도 사주를 볼 예정이라 예고했다. 이번에는 무당의 예견이 아닌 운명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 제안했지만 보는 게 좋겠다 한다.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무당이 시키는 데로 조심하면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김 작가님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픈 과거를 무당을 통해 치유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두 분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나서 무당과 굿에 대한 트라우마로 선입감을 가지고 온 세월을 어쩌면 이번 계기로 털어버려 희석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데 L과 김 작가님에게 무당이란 편안함에 특이함이 아닌 일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왜 사람은 가족이, 사람이 죽으면 무서워해야 하고, 공동묘지가 무서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왜 무당은 귀신을 쫓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일까?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잘돼라 돕고 돕겠지, 꼬장을 부리진 않을 것 같다.


지금 바라는 것은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는 부정보다 조금 긍정의 무당으로 상처 입은 분들을 겁주긴 보다 치유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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