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영혼
칼춤을 추고 칼을 던졌다. 칼이 마당에 꼽혀 서야 병이 물리쳐진다 했다. 칼이 마당에 설리가 없다. 그렇게 병마와 싸우다 서른 초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부쥐와 무당 이야기다. 암이란 병마를 알 수가 없었던 시골이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고 철이든 후 암인 줄 알게 되었고, 칼이 마당에 서더라도 병을 고칠 수 없었다는 것도 알았다.
마지막 절박함에 몰린 사람들이 의지 할 수 있을 만큼의 의료 서비스를 기대할 시대가 아니어서 굿판은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절박했던 순간의 일들이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았다. 무당굿과 엑스레이 필름, 둘은 평생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워 왔다.
작년 출장 중 L에게 연락했다. 소주와 적당한 음주를 좋아하는 지라 연락하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선약이 있다고 극구 갈 수 없다 한다. 평소 그럴 L이 아닌데 말이다. 용한 무당과의 예약이란다. 놀랐다.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했더니 용해 사람이 밀려 언제 끝날 지 모른다 했다.
브런치 김*연 작가님의 무당에 관한 글을 읽었다. L이나 김 작가님의 글에는 무당이라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없고 친숙하게 즐기는 듯했다. 이때까지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일상처럼 보이고 옛날에 느꼈던 절박함도 없고 편안해 보였다.
L은 이번 신년에도 사주를 볼 예정이라 예고했다. 이번에는 무당의 예견이 아닌 운명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 제안했지만 보는 게 좋겠다 한다.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무당이 시키는 데로 조심하면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김 작가님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픈 과거를 무당을 통해 치유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두 분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나서 무당과 굿에 대한 트라우마로 선입감을 가지고 온 세월을 어쩌면 이번 계기로 털어버려 희석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데 L과 김 작가님에게 무당이란 편안함에 특이함이 아닌 일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왜 사람은 가족이, 사람이 죽으면 무서워해야 하고, 공동묘지가 무서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왜 무당은 귀신을 쫓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일까?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잘돼라 돕고 돕겠지, 꼬장을 부리진 않을 것 같다.
지금 바라는 것은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는 부정보다 조금 긍정의 무당으로 상처 입은 분들을 겁주긴 보다 치유로 다가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