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이고 또 까이고
최근 과한 업무는 정신마저도 휑하게 만들어 버린 모양새다. 오늘이 그랬다. 긴 출장으로부터 복귀한 오늘 분명 요일이 금요일 이어야 했다. 일찍 퇴근키 위해 한 시간 일찍 출근을 했었고, 금요일 점심인 오늘 분명히 점심약속을 한 터라 도시락이 필요하지 않아야 했다.
오전 업무, 기관장이 오전회의와 오후 출장이란 비서실 정보에 재빠르게 집무실로 달려가 핵심 엑기스 보고 시간 3분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다른 상사에겐 금요일 임에 월요일 찾아뵙겠다 아뢰고, 직원들에게는 오늘까지 마감해야 할 일에 대하여 다급하게 독촉을 했다. 금요일임에 이번주 내로 마무리해야 할 일 들이라 마음이 급했다.
점심시간이 다 달아 약속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금요일의 환상에서 벗어나 목요일인 현실로 돌아왔다. 점심 약속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정신없음을 질책을 했고, 그 보다 더 황당한 것은 먹을 점심이 없다는 것. 결국 임기응변으로 동료 밥 구걸로 훈훈한 마무리가 되었다지만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날이고 말았다.
감성이 필요한 허한 금요일 아닌 목요일 저녁에 소주, 맥주 한잔에 마을을 달래 보려 이리저리 기웃, "세상에 이런 날"은 누가 소주 한잔 받아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부산 절친 L은 이 와중에 남의 속도 모르고 미루어 온 저녁 회식 약속 간다 들뜬 마음을 전해오는데 상황인 만큼 이거는 염장테러질임이 틀림이 없다.
후배 K군에게는 워크숍이 예상보다 늦다 까이고, 동료 K군에게는 늦은 중년에 늦깎이 피아노 레슨 날이라 까이고, 탁구장 동생은 이미 소주를 벗 삼아 고기를 신나게 굽고 있고, 사진동호회 효자 C군은 아부지가 허하실까 걱정된다 막걸리 한통 들고 위문 간다 하고, 직장을 방문한 오디오 동호회 대장은 너무 많은 주량과 자리가 길어질 것 같아 카페 차 한잔 대접에 보내드렸다.
까이고, 까이고 또 까이고 까이고
아침부터 정신이 이상해지고, 운수 나쁜 날은 앞뒤옆으로 넘어져도 코 깨질 상황이란 거 안다. 그래서 별로 소주를 즐기지 않음에도 소주 한잔 같이 하자는 이런 날은 마음이 멜랑꾸리 하거나 허한 날로 위로받고 싶은 간절한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눈치채는 한놈 없다는 것은 평소 덕을 쌓지 못한 자신의 탓일까? 눈치 없는 놈들 탓일까?
냉장고 구석에 꼬불친 맥주 한 캔 꺼내어, 하루 더 주어진 보너스 금요일에 일 을 할 수 있어 감사(?)하며, 벌컥 마셔보며 직장인의 범상한 긴 하루를 돌아본다. 눈치 있는 똑똑한 단 한놈이 절실히 필요한 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