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이른 아침에 우리 가족은 주왕산을 향해 떠났다. 평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예능 1박 2일에 주왕산 가는 여정이 나왔다며 아버지는 우리도 한번 주왕산에 가보자고 말씀하셨다. 가을에는 주왕산 단풍이 그렇게 예쁘다며 엄마와 나, 그리고 여동생에게 여행을 제안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의 승용차를 타고 주왕산 가는 여정에 올랐다.
가는 길은 막히지도 않았고, 날씨는 청명했다. 가는 도중 천안 휴게소에 들러 -유명하다는 호두과자는 먹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맥반석 오징어,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 엄마가 고른 핫바 등을 사 가지고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동안 군것질을 했다. 가는 동안 평소 잘 듣지 않았던 라디오도 듣고 바빠서 그동안 가족끼리 나누지 못했던 얘기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3, 4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될 즈음에 우리는 주왕산 입구에 도착했다. 멀리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거대한 수풀이 둘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식당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청송식당이라는 음식점에서 -원래는 더덕구이 정식과 해물파전을 먹고 싶었지만 가격대가 너무 비싼 관계로- 산채비빔밥과 시골된장찌개, 사과막걸리를 주문했다. 식당은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여기저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마치 시장을 방불케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산채비빔밥과 시골된장찌개가 나왔는데, 산의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밥맛이 꿀맛처럼 달게 느껴졌다. 거기다 이 지방 청송의 특산물 사과로 만든 막걸리는 달짝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식사로 시장기를 달랜 우리 가족은 본격적으로 산행에 나섰다. 산행이라고 해봐야 둘레길을 도는 코스였지만, 가파른 계단도 이어져 있어 마냥 쉬운 코스는 아니었다. 둘레길을 도는 내내 계곡의 물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폭포들이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어서 시원한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을 벗지 못했는지 나무들은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단풍이 든 나무를 찾기는 모래사장에서 진주알 찾는 것보다 어려운 듯했다. 그래도 낙엽송, 참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지나면서 산의 웅대함을 느끼기도 했고, 산자락의 주상절리를 보면서 산의 역사를 감상하기도 했다.
계곡과 폭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 가족은 가는 곳-사진 찍기 좋은 명소-마다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늙어가는데 기록이라도 남기자는 아빠의 지론과 기록보다는 풍경을 눈에 담아 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엄마의 지론은 각자 달랐지만, 함께 사진 찍을 때는 아이가 된 듯 해맑게 웃었다. 얼굴이 다홍색으로 달아올라 있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 엄마의 소녀 같은 웃음에 나와 여동생도 미소가 지어졌다. 한편, 여동생은 계곡 물이 내려가는 동영상과 폭포가 떨어지는 동영상을 찍어 그것을 바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반면, 나는 풍경사진이나 부모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지 않을 때는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서 둘레길을 걸었다.
수묵화 병풍을 여러 겹 겹쳐놓은 것처럼 산은 생생하게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무와 돌과 물,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자태 그대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잎새의 병이라고 불리는 -나의 은사 이경교 교수님의 책 청춘 서간에서는 단풍을 잎새의 병이라고 비유한다- 단풍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단풍을 보았더라면 겨울의 길목에 다다른 생명의 아스라 짐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장 높은 계곡의 폭포에서 정점에 다다른 주왕산을 뒤로하고 우리는 둘레길을 되돌아와 미리 예약해둔 펜션으로 향했다. 주왕산 근처에 자리한 사과나무 펜션에는 작은 하얀 나무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작은 하얀 나무집들 중 하나가 우리가 묵게 될 숙소였다. 사과나무 2호.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산행으로 지친 발을 녹였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미리 보일러를 켜 둔 주인의 정성 덕분인지 노곤했던 발의 근육들이 이완되는 것 같았다. 특히 나는 산행으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따뜻한 온수 속에서 샤워를 하니, 몸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운 뒤, 아버지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오늘 산행에 대해서, 일상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 길게 말하지 않으시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웬일인지 말씀을 길게 하셨다. 과거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고 아버지가 어렸을 때 크게 다쳤던 이야기도 말씀하셨다. 개구멍을 지나다가 철조망에 종아리가 걸렸는데, 살점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약이 없어 담뱃재와 된장을 발랐다고도 했다. 순간, 빛에 비친 아버지의 오래된 상처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과거를 들으면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과연 아버지께 관심이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오후 시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저녁시간이 되어 예약해둔 백숙집으로 향했다. 백숙집은 펜션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백숙 집도 관광객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미리 예약해둔 덕에 우리는 남들보다는 일찍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토종닭백숙이 나왔는데, 탕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릇에 삶아진 닭 한 마리가 담겨 나왔다.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맛은 좋았다. 쫄깃쫄깃한 살을 소금에 찍어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닭다리를 먹으라고 뜯어주었다. 나와 동생은 연한 닭다리살을 뜯어 다시 그릇에 두었다. 그릇에 둔 살을 가족끼리 나눠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난 뒤에 죽이 나왔다. 죽은 연보랏빛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율무죽이어서 빛깔이 그랬던 것이었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펜션으로 돌아와 마른오징어, 꼬깔콘에 맥주를 마시며 예능을 보았다. 엄마가 산행이 고되었는지 발이 아프다 하셔서 나와 동생이 엄마의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동생은 나보다 더 마사지를 잘했는데 동생에게 잘한다 얘기하자, 동생은 자기도 다리가 자주 아파 아픈 부위를 잘 안다 했다. 동생의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심전심, 동병상련인가 보다 하고.
9시쯤 되어서 일찍 잠이 든 우리 가족은 아침 6시쯤에 아버지를 시작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내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아우성을 쳤다. 애인도 내 코골이가 심하다고 한번 녹음해서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산이 떠나가라 울려대는 대포소리였다. 여태 각자 따로 자다가 이번에 제대로 내 코골이 소리를 듣게 된 가족들은 -특히 엄마는- 살을 빼야 코를 덜 곤다며 얼른 살을 빼라 했다. 한동안 코골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우리는 아침으로 아버지가 끓인 라면을 먹고 다음 여행 목적지인 절골계곡과 주산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이라 그런지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외투를 가져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투를 단단히 여며 입고 우리는 절골계곡 산행길에 올랐다. 자연이 만든 경관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고 평화로워 보였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다리를 건너며 냇물에 비친 우리들의 그림자에 웃음 짓기도 했다. 계곡 주변의 자갈들은 빼곡히 놓여 있었는데, 그 자갈들을 밝으면 자글자글 돌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냇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은 아슬아슬하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물소리와 바람 소리뿐인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일었다.
징검다리가 물속에 빠져 있어 더 이상 냇물을 건너가기가 쉽지 않자, 아버지는 우리에게 돌아가자 했다. 우리는 절골계곡을 되돌아 나와서 차량이 세워진 매표소로 다시 나왔다. 우리는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차에 올라 주산지로 향했다.
주산지는 절골계곡에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차량을 주차장에 대고 생수를 챙겨 주산지 입구로 들어갔다. 주산지는 조금 높은 지대에 자리했다. 산책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자, 큰 호수가 눈앞에 드러났다.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볕 들 이 마치 별처럼 호수의 잔물결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낮에 은하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황홀한 느낌이었다. 주산지에는 수경 나무들도 있었는데, 메말라가는 땅에서 호수로 이식한 것이라 했다. 호수 위에 솟아 있고 튼튼하고 강하게 뻗은 푸른 나무를 보자, 나무의 생명력이 느껴져 나도 에너지가 절로 솟는 느낌이었다. 호수에는 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잉어 떼들이 수면 가까이까지 올라와 서로 엉켜 있는 걸 보니 한편으로는 끈질긴 생명력에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주산지를 한 바퀴 돌고 나와 우리는 근처의 송어 횟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횟집 입구에 다다르자, 가게 안에서 날씬하고 안경이 제법 잘 어울리는 청년이 나와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송어 2kg를 주문했다. 송어와 야채 -깻잎, 오이, 상추, 당근 등-가 나오자, 우리는 송어와 야채를 개인용 그릇에 넣고 간 마늘과 초고추장, 참기름, 콩가루를 취향껏 덜어 숟가락으로 섞었다. 그리고 갖가지 향이 섞인 송어회무침을 한 숟가락씩 퍼먹었다. 송어의 부드러운 생선살과 야채의 아삭한 식감, 마늘, 초고추장, 참기름, 콩가루가 섞인 풍부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두 그릇을 비워냈다. 가족들도 식욕이 당기던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추가로 1kg와 야채 추가를 주문했고, 아까 우리를 안내했던 청년이 와서 음식을 내왔다.
음식을 다 먹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청년이 사과즙 드릴게요, 하고 사과즙이 담긴 4개의 팩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차에 올라 집을 향해 가면서 청년이 친절하다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청년의 나이대만 맞으면 여동생과 만나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 말에 동생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돌아오는 길은 교통체증,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운전을 하신 아버지는 졸음을 쫓으려 껌을 씹으셨고, 엄마와 동생은 피곤에 지쳐 잠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교통체증을 견뎌내고 강아지들이 기다리고 있던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강아지들이 싸놓은 대소변을 치우느라 바빴다. 짐을 풀고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엄마는 저녁식사로 샤부샤부를 준비하셨고,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이번 여행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번 가을 산행에서 가족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 부모님이 늙어가시고 있다는 것, 자연은 언제나 위대하고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행 일정을 너무 무리하게 잡은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기도 했다. 다음번에는 겨울 산행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겨울에 보는 산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