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26살 4월, 전 재산을 걸고 얻은 전셋집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부동산 거래라는 것을 해 볼일이 없었고 이 전셋집도 둘째 시누이가 얻어준 것이었는데 입주를 하고 보니 등기부 주인과 실질 주인이 다른 집입니다. 그런 경우 등기부 주인과 계약을 하면 문제가 없는데 하필 나는 등기부 주인과 계약서를 쓰지 않고 실질적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이와 계약서를 쓴 상황이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입주한 아파트가 지어지다 중간에 부도가 났고 아파트를 짓고 있던 건설사는 공사비 대신 아파트를 대납받은 상황이었습니다. 부도로 인해 당초 계약금액보다 집집마다 추가분담금이 발생했고 이를 처리했던 아파트운영위원회에서는 추가분담금을 납부하는 세대에게만 소유권을 이전해주었습니다.
건설사로써는 당장 재산권 행사를 할 일이 없으니 추가분담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소유권이 여전히 아파트운영위원회로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일명 명의신탁이 되어 있는 집에 전세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상황파악도 정확하게 안되는 시간속에 막연하게 내 전세금이 사라질수도 있다는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습니다.
1998년 4월 전세자금 3700만원은 나의 전 재산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만져본 가장 큰 금액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급한 마음에 둘째시누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야, 그냥 대충살아. 무슨일이 일어난다고 그래. 자꾸 그런 생각하면 재수없어.“
그래도 믿을건 남편밖에 없는데 그 오빠(?)야도 나와 다를바 없는 어리고 무식한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두렵고 상황이 벅차면 일단 회피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부터 혹시 내가 외출한 사이 갑자기 집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집 밖으로 나가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집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자고 또 자는 식이었습니다. 최소한 잠을 자는 동안은 공포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 그랬던 것이지만 그 시간들만큼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져 갔습니다.
이런 경우 다음 시나리오는 우울증입니다. 나에게도 우울감이 자연스레 찾아왔고 혼자 있는 시간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훅~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가 심하게 올라왔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마치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새처럼 구름 위에 올라앉아 두둥실 날아 올라갈 것 같은 환각을 느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료분업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를 팔았습니다. 한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었던지라 나는 동네 약국을 모조리 훓고 지나가며 수면제 20-30알을 사 모았습니다. 당시 남편은 24시간 근무, 24시간 휴무라 눈뜨고 집에 있는 날이 더 귀했고 그날 밤도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나 혼자였습니다.
책상에 앉아 유언장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없었으니 부모님과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남편에게 어쩌고 저쩌고... 뭐 이제 막 결혼한 사람들이니 얼마나 애절했던지~~
그리고 부모님에게 글을 적기 시작하는데~~~~~~~~
일단 눈물은 기본이었지만 송구하고 마음아프고~~~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가 평소 나에게 하시던 말이 생각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방안에 알수 없는 에너지가 차 올랐습니다.
어린시절 전신마비라는 질병을 딛고 형제들 중 누구보다 공부도 잘하고 애교스럽던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유독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내게 그러셨습니다.
“ 니는 우리집에서 해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나가서 해는 못되어도 달은 되어야 안 되긋나.”
아버지는 나를 기르며 평생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우리 예삐~”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귀하게 길렀는데. 고작 3700만원에 죽는다고? 내가 살면서 설마 이 돈보다는 더 벌지 않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살면서 37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번, 천번 양보해도 내 목숨값이 3700만원 보다는 비싸다는 결론이 들었지요.
'그럼 죽으면 안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저는 죽음의 문턱에서 내 존재의 참 가치를 만났습니다.
옛말에 죽을 각오를 하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죽음을 대신해서 덤벼드는 시간이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일단 건설회사 담당자를 찾아서 매일 졸라대었습니다.
‘내 돈 돌려달라고. 안 그러면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그것도 아니면 빨리 추가분담금 갚고 명의이전 해 가 달라고.’
일개 회사 실무자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그는 아무 문제 없을테니 마음 놓고 살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렇지만 1998년 5월은 IMF가 온 직후였고 많은 대기업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부도가 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건설회사가 대납받은 아파트가 약 15채 전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 한 채를 회사 기숙사로 쓰고 있었는데 업무 담당자도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낮에는 회사로, 밤에는 기숙사로 찾아가며 부탁과 협박을 반복하고 불쌍하게 울며 애원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회사에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각서를 하나 받아내었습니다.
“만약 ㅇㅇ건설사가 부도처리 될 경우 명의신탁되어 있는 ㅇㅇㅇ호 아파트에 대한 전세금을 즉시 반환한다. 그러지 못할경우 세입자 최영희에게로 그 소유권을 이전하는것에 동의한다.”
난생 처음 법무사에 가서 공증이라는 것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건설회사가 그런 각서를 써 주고 공증을 해 주었는지 의문이지만 저는 기적적으로 눈앞에 있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아파트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몇 개월 후 거짓말처럼 그 건설회사가 부도처리 되었습니다.
15채 중 그런 안전망을 준비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습니다. 회사 부도가 나자 다른 집의 세입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그 집에 대한 소유권을 넘기라는 내용으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 회사는 연대보증한 회사들의 부도로 돌아오는 채무가 너무 힘들어 고의 부도를 낸 상황이었습니다.
파산법에 부도처리 될 경우 연대보증 회사의 부채 의무는 사라진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여하튼 전세값으로 아파트를 넘길 수 없었던 회사는 나와의 소송에서 패소하자 결국 아파트운영위원회에 분담금을 납부하고 그들 앞으로 명의이전을 해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멋진 스토리이지만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겪으며 저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일단 몰라서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회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해결할 때 답이 나온다.’
그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내 삶을 지배하는 큰 줄기가 되었고 그 이후로 만나는 수많은 어려움에 뒷걸음치지 않고 나아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학교시험 문제를 풀 때 가장 어리석은 것이 모르는 문제를 끝까지 안고 있다가 다른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인생 문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눈앞의 문제를 건너뛰고 다른 일을 행복하게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회피하지 말고 무조건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어차피 내가 아닌 그 누구도 풀어 줄 수도 풀어 낼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이 이 문제의 주인입니다.
‘인생 문제는 건너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