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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Jul 03. 2024

사랑에 통역이 필요할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으로

영화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아 코폴라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다.

영화에는

산토리 위스키의 광고 모델이었던

아버지 코폴라의 경험과

일본에 잠시 거주했던

딸 코폴라의 경험이 담겨있다.

마피아 패밀리를 다룬 걸작들을 만든 아버지와 달리,

딸 소피아 코폴라는

패밀리(가정)와 관계가 느슨해진 탓에

외로움에 시달리는 기혼남녀에 대한

빼어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도쿄의 고급 호텔에 투숙한

밥(빌 머레이)과 샬럿(스칼릿 조핸슨)이다.

전성기가 지난 할리우드 스타 밥에게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찍으려고 찾아온 도쿄는

외계 행성이나 다름없다.

일본어 네온간판이 현란하게 반짝거리고

아침이면 커튼이 저절로 열리는

도시의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샤워기의 높이도 너무 낮다.

일본어로 조작되는 헬스장의 기계는

제멋대로 그의 몸을 조종한다.


"산토리 타임"을 선언하는 밥의 근엄한 얼굴.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는

외계어나 다름없다.

그는 자신을 “보브 상”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

“산토리 타임”을 외치는 것으로

연기 지시를 마무리하는 광고 감독이 내리는

이해되지 않는 지시에 따라

미국에 돌아가면 마실 일이 없을,

그의 주변사람들뿐 아니라

그 자신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을 산토리 광고를

진지한 표정과 어조로 찍어야 하는 신세다.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도쿄에 온 샬럿은

일본문화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일에 바쁜 남편에 의해 호텔에 방치되다시피 한

예일대 철학과 출신인 그녀는

신칸센을 타고 교토를 찾아가면서까지

일본을 이해하려 해 보지만,

결국에는 “R”과 “L”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은

자신들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토로하기에 이른다.


타지에서 만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두 남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타지에서 만난

상대의 외로움을 알아차린 두 사람은

호텔과 도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애정을 키운다.

두 사람은 1950년대 말의 로마에서

화려하지만 공허한 삶을 사는

인간군상을 담아낸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을

호텔방에서 함께 시청하기도 한다.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된 기혼남녀가

낯선 도시에서 갖는 “산토리 타임”을 담아낸 영화가

가정 있는 남녀가 벌이는 불륜을 담은

저속한 영화로 전락하지 않는 건

밥과 샬럿이 벌이는 19금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영화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된 것은

모든 것이 낯선 도쿄에서 두 주인공이 느끼는 외로움을

관객이 체감할 정도로 절절하게,

그렇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산토리 타임."

밥과 샬럿은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어려움은

근본적으로는 소통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형편없는 통역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상태(lost in translation)”를 가리키는

영화 제목에서

“형편없는 통역”은

영어와 일본어 사이의 통역 차원에서만,

즉 언어적인 차원에서만 행해지는 게 아니다.


“와인색”이 무엇인지에 대한

밥의 아내와 밥의 생각이 다른 것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영어를 알아듣는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등장인물들이 하는 전화통화는

상대의 말이 잘 들리지 않거나

상대가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탓에

한 말을 다시 해야 하거나

누군가의 방해를 받기 일쑤다.

샬럿은 밥에게

그가 하룻밤을 보낸 가수와

“연배가 비슷해서 말이 잘 통하겠다”라고

질투심 섞인 말을 한다.


샤부샤부 식당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상에 오래 남는,

떠올릴 때마다 빙긋 웃게 만드는 장면이

밥과 샬럿이 샤부샤부 식당에 간 장면과

그에 이어지는 장면이다.

메뉴판에 찍힌 메뉴 사진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도 재미있지만,

더 재미있는 순간은

호텔에 돌아온 두 사람이

비상벨이 울리는 바람에 밖으로 대피했다 만났을 때

빌 머레이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순간이다.

“손님에게 요리를 시키는 식당이 어디 있어요?”

식당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대사다.

샤부샤부 식당의 서비스는

음식재료들을 제대로 손질해서 제공하는 선까지인 걸까?


밥이 광고를 촬영할 때 깔끔한 옷매무새를 만들어내려고

등에 집었던 클립들을

촬영이 끝난 후 호텔에서도

계속 달고 돌아다니는 장면도 재미있다.


영화에는 두 사람이 외롭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과

두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게끔 만드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내게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밥이 호텔방에서 TV 채널을 돌리는 장면이다.

채널 중 한 곳에서

그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영화가 방송되고 있다.

그 영화 속의 그는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TV에 등장해서는

내가 구사하지 못하는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금 이곳과는 다른 평행우주를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사람을 외롭게 만들,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 상황이 있을까?

한편, 딥페이크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이 모습은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많은 이들이 직접 목격하게 될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느낀 외로움이 어찌나 컸던지

밥은 시간감각에도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애초에 일본에 잠깐 머무르다

부리나케 미국으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던 그는

뒤늦게 출연하기로 결정한

TV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정도로

일본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

아마도 샬럿에 대한 애정 때문에

체류기간을 연장한 걸 텐데,

영화에서 밥이 일본에 머무르는 기간이

며칠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군중 속의 남녀

결국 밥은 일본을 떠나고

두 사람은 호텔에서 작별인사를 나눈다.

밥은 미국에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고

샬럿도 조만간 남편과 함께 일본을 떠날 것이다.

작별인사를 나눴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도쿄의 북적거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껴안고는

서로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인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걸까?

그런데 사랑에 굳이 말이 필요한가?

애초에 말이 필요하지 않다면

통역이 필요할 이유가 있나?

통역할 필요가 없다면

형편없는 통역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 아닌가?


다친 발가락 때문에 병원에 간 샬럿은

의사가 일본어로 들려주는 진찰 소견을

잘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경청한다.

같은 시각,

대기실에 있던 밥은

일본인 노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갖가지 몸짓과 표정을 써가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상대를 이해하겠다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소피아 코폴라의 생각인 걸까?

사랑은 언어와 통역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생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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