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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 경찰은 배트맨을 안 잡는 걸까, 못 잡는 걸까?

<배트맨 비긴즈>

by 윤철희

근본적인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겠다.

“배트맨은 과연 슈퍼히어로일까?”


모름지기 슈퍼히어로라면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평범한 인간에게는 없는 초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아이언맨처럼 슈퍼히어로와 맞붙더라도 밀리지 않는 위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첨단장비로 중무장할 수 있어야 하거나.


그런데 배트맨은 어떤가?

나도 안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배리 앨런이 “당신의 초능력은 뭐냐?”라고 물었을 때

브루스 웨인이 “돈”이라고 대답했다는 건.

그런데 아무리 관대한 마음으로 판단해 보더라도,

브루스 웨인이 그 돈으로 마련해 사용하는 장비의 수준은

같은 억만장자인 토니 스타크가 사용하는 장비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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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배트맨은 탁월한 운동능력과 정신력,

“탐정”을 자처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에다

막강한 재력을 통해 갖춘 장비빨로 승부를 보는 캐릭터이지

슈퍼히어로로 보기에는 어려운 존재다.

내가 보기에, 배트맨은 슈퍼히어로보다는

가제트 형사에 더 가까운 존재다.

나는 그래서 배트맨 캐릭터를 좋아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는

슈퍼히어로도 없고 슈퍼빌런도 없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보다 신체적 능력이,

그리고 선이든 악이든 정신적 의지가 더 뛰어난 인물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인기 좋은 슈퍼히어로 캐릭터인

배트맨을 다룬 많은 영화들 중에서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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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배트맨은

팀 버튼의 배트맨과

이후에 나온 다른 영화들에 등장한 배트맨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내가 보는 제일 중요한 차이점은

배트맨을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내가 앞서 제시한 일반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인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놀란의 화면은 어둡지 않다.

팀 버튼과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영화들이 어두웠던 데에는

제작비 탓이 컸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반적인 스타일 면에서 놀란의 영화는

많은 부분이 밝은 대낮에 환하게 트인 공간에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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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놀란은 광활한 자연공간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고담시를 벗어난 공간을 담아낸 적이 있던가 싶은

다른 배트맨 영화들하고는 달리,

놀란의 영화는 히말라야산맥과 빙하, 광활한 벌판 같은

자연공간으로 나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런 자연공간에 있건 도시의 초고층빌딩에 있건

배트맨은 드넓은 스크린 속에 덩그러니 서있는

외롭고 왜소한 존재로 꾸준히 묘사된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도시의 공간이

배트맨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대로서 존재하는 느낌이라면,

한스 짐머의 급박하게 흐르는 선율이 긴장감을 조성하는

놀란의 영화 속 도시 공간은

공권력과 범죄자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인 배트맨이

고독하게 전투를 벌이는 전쟁터라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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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은 이런 시각적 특징을 통해

다른 배트맨 영화들의 만화 같은 스타일하고는 다른

사실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내가 <배트맨 비긴즈>에서 특히 좋아하는 장면도

사실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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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항상 궁금했었다.

저들이 입는 슈트는 누가 짓고 누가 세탁하며

저들이 쓰는 장비는 어떻게 조달하고 어떻게 유지보수를 할까?

(장비를 만들고 테스트하는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아이언맨과

웹 슈터를 직접 만들고 첨단 슈트는 아이언맨에게서 받는 스파이더맨 말고

다른 히어로들이 그렇게 하는 사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트맨 비긴즈>에는 내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영화를 대단히 사실적인 영화로 만들어주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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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브루스 웨인이

활동하기 편하고 방어능력도 좋은 슈트를 장만하는 문제를 놓고

알프레드와 상의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마스크를 중국에 주문하고 조립은 직접 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1만 개를 대량 주문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고는 제품의 강도를 테스트해 본 후 새로 주문하기로 결정한다.

알프레드는 마스크가 깨질까 봐

“웬만하면 맨 땅에 헤딩은 피하라”라고 충고하지만

웨인은 충고를 거스르고는 팔코니에게 헤딩한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 모양 표창도 직접 만들고,

아머에 색도 직접 입힌다.

배트 케이브를 만드는 과정도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나는 이런 현실적인 설정이 놀란의 배트맨을

다른 배트맨들보다 더 관객에게 친밀한 존재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배트맨 비긴즈>가 영화 내내

실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라스 알 굴의 부하들에 의해 외부와 두절된 내로우즈의 야간 풍경,

높은 곳을 달리는 고가전철과 고담시티의 스카이라인을 보여주는 장면은

표현주의적 스타일로 묘사되면서 영화 전반의 사실적인 분위기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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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옥에 티” 같은 이런 스타일을

놀란이 빠듯한 제작비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세계적인 거장이 됐지만,

이 영화를 연출할 당시는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메멘토>로

두각을 나타내고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아직 세계적인 히트작은 내놓지 못한 감독이었다.

그런 탓에 “제작비를 마음껏 쓰기 힘들었다”는 놀란의 발언을

나는 크게 의심하지 않고 수긍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려고 확인해 보니

<배트맨 비긴즈>는 제작비가 1억 5천만 달러나 든 영화였다.

요즘에 비하면 아주 많은 제작비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20년 전쯤의 제작비로는 굉장히 많은 액수였고

그래서 어느 정도 흥행이 됐음에도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겼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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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 얘기가 나온 참에 <배트맨 비긴즈>에 나오는

설정의 허점도 얘기해 보겠다.

클라이맥스에서 라스 알 굴 일당이 사용하는 무기는 액체 증발기다.

극초단파를 방출해 순식간에 물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장비인데,

이 장비를 쓰면 수도관에 흐르는 물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체내에 있는 수분이 먼저 증발될 것이다.

내로우즈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워낙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탓에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설정의 문제점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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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배트맨 비긴즈>는 이런 단점들도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들로 여겨지게 만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들도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방탕하게 구는 척하는 브루스에 실망한 레이첼이 던지는 대사에 담겨있다.

“지금의 너를 말해주는 것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무슨 행동을 하느냐야.”


마지막으로 배트맨이 등장하는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또 다른 궁금증 얘기를 하겠다.

고담 경찰은 배트맨의 정체를 못 밝히는 걸까, 안 밝히는 걸까?

배트맨이 사용하는 첨단 장비를 보면

고담시티 경찰국의 과학수사 기법도 상당한 수준일 법한데

배트맨이 나타났던 현장에 CSI가 충돌한 걸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제임스 고든을 비롯한 고담시티 경찰 고위층은

일부러 CSI의 출동을 막고 있는 걸까?

고담의 경제를 지탱하는 웨인 컴퍼니의 소유자에게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다가는

고담의 경제시스템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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