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질문은 오래 생각해야만 했다.
남자로서의 나, 남자로서의 아버지, 남자인 친구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생각해야할 것들이 많은 관계다.
남자로 태어나 당연하다는 듯, 오히려 당당하게고추를 드러내고 찍은 돌 사진은
'남근'을 지닌 자의 당당함이라기 보다 '남근'을 가진 생명을 낳아, 비로소 '아들을 낳아야지.'라는 고전적 질문들과 '아들도 못낳는'이라는 고전적 차별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에 대해 무엇보다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길러진다는 것이다]
늘 나의 남성에 대한 가치관은 입을 꾹 닫은 채로 말이 없던 아버지로 부터, 그리고 남성에 대한 편견은 늘 아버지를 하찮게 대하던 어머니로 부터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아버지는 나에게 여전히 남자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작정 답답했고, 나이들어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는 더 답답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터지면 골치 아프지만 떼어버려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맹장처럼, 아버지는 가족의 언저리를 맴도는 모습이었다.
공감도 동정도 받지 못한 채 아련하기만 한 이름으로 쓸쓸하게 남은, 아버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로 길러졌지만, 사실 정작 사람으로서,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깨치지 못했다. 그냥 남자라는 무게와 남자라는 껍질에 싸여 다스베이더의 철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아버지다.
항상 나는 궁금했다.
당신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건, 키워준 아버지건 상관없이 왜 내가 당신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지, 당신은 답할 수 있는지. 자신의 아비로 부터 아비의 역할을 배워본 적 없는 아버지들은 어쩌면 부모는 있으나 고아나 다름없이 삶았던 것은 아닌지....
강해야 하고, 가족들을 위해 일해야 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숨기고, 울어서도 안된다고 배운 남자들.
나의 아버지.
참 가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