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사춘기를 넘어가다

손성훈입니다

by 최일출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시절의 나는 항상 화가 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고가 나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 잡았는지 나는 방황을 했다. 공부는 접은 지 오래였고 삶의 집중력도 잃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사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극단적인 무력감이 찾아왔다.


그 당시에 제일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사고란 게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는데, 굳이 아등바등하면서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을까?’, ‘인생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는데, 혹은 아버지처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 ‘아, 재미없다’, ‘귀찮아 죽겠다!’


우울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집에서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던 삶인 것처럼 다들 아버지와 관해서는 함구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가족들끼리 아버지에게 욕이라도 실컷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랬더라면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가 조금은 해결되었을지 모른다. 어느 심리학책에서 봤는데, 상처는 꼭꼭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드러내서 함께 나누는 것이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상처의 크기도 줄어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들이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할 때쯤에는 누나가 집을 나갔다. 이제 겨우 정상적인 가정에서 생활하는가 했는데, 누나의 가출로 인해 나의 방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나는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때마침 나는 사춘기까지 심하게 겪고 있었다. 사춘기를 빙자해서 어린 시절에 채워지지 않은 욕구와 결핍을 반항으로 표출했다. 엄마의 잔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누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싸울 듯이 시비조로 대응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귀찮아서 집에서 처박혀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삶의 재미도 사라졌고, 숨을 쉬기 때문에 살아가는 의미 없는 생활을 반복했다. 나는 점점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에 빠졌다. 재밌다기보다는 딱히 할 게 없어서 게임을 했는데,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중독이 되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새벽에 배가 고프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을 끓이기는 했지만, 먹은 후에 정리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귀찮아서 먹다 남은 라면 찌꺼기와 국물을 치우지도 않고 책상 위에 고스란히 놓아두기 일쑤였다.

그 무렵,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는 매력적이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나에게 담배는 사람을 대신하여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담배 연기를 폐 깊숙이 넣었다가 길게 뿜어내면 마음속의 분노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상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걸핏하면 싸우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나에게 엄마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데에다 점점 겁이 없는 난폭한 아이로 변해갔다. 말 그대로 반항아였다. 누가 나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언제나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누나까지 가출해 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나는 ‘될 데로 돼라’ 식의 막가파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망과 누나에게 버림받은 충격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거칠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유일한 것이 있었다. 교회였다. 나는 교회의 위원장으로 학생예배 찬양을 인도했는데,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친히 찾아와 나의 영혼을 위로해 주시고 어루만져주셨다. 그러면서 나를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처한 이 어려움에서 반드시 건져 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내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