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연인의 모습에서 여인을 넘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찾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남겼다면?
한 번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인공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그러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라파엘로와 그와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녀 역시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뮤즈 마르게리타 루티다.
우리에게는 '빵집딸'이란 애칭(?)으로 유명한 여인이기도 하다.
바로 이 그림 때문이다.
'La Fornarina', 1519, 라파엘로, Palazzo Barberini, 로마
'빵집딸(La Fornarina)'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자신의 집에 은밀히 소장하고 있었던 그림이다.
머리에는 당시 신분 높은 여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터번에 역시 당시 트렌드였던 진주와 루비로 장식된 핀을 꼽고 속이 훤히 비치는 천으로 몸을 감싸고는 있으나 취하고 있는 자세는 '정숙한 비너스(Vinus Pudica:오른손으로는 가슴을, 왼손으론 주요 부위를 가리고 있는 자세)'의 포즈를 취해 그림 속 여인은 정숙한 여인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며 가슴을 감싼 오른손은 자연스레 왼쪽 팔뚝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가리키면서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하는데 거기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싸인이 또렷이 보인다.
그뿐인가.
그림이 그려지고 500여 년이 지나서는 더욱 중요한 싸인이 드러나는데...
그림의 제목 'La Fornarina'는 엄밀히 말하면 '빵 굽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시에나 출신의 제빵사로 서민들이 모여 살던 로마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지역에서 실제로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굳어진 듯하다.
원래 그녀는 모델일을 하는 여인이 아니었으나 라파엘로는 그녀를 보자마자 모델일을 제안했다고 한다.
첫눈에 반한 케이스다.
라파엘로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르네상스 대표 화가지만 그와 그림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려면 잠깐 라파엘로의 인생사를 알고 갈 필요가 있지 싶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중부의 우르비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가 궁정화가였던 덕에 어려서부터 그림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는 데다 천부적 재능까지 더해져 젊은 나이에 이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이름만 들어도 숨 막히는 대가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라파엘로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화가였던 아버지 마저 11세에 세상을 뜨자 숙부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그의 성모 그림에 남아 있다고 해석되는 부분이다.
그는 '성모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길지 않은 그의 생애에 모두 34편의 성모 작품을 남겼다.
기존에 그려지던 근엄하고 고정화된 성모상이 아니라 그의 작품 속의 성모상은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젊은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Madonna di San Sisto', 1513-14,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라파엘로의 성모상 중 최고의 작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런 기법은 그가 로마로 이전해 온 뒤에 그린 성모상에서 두드러 진다.
여기에도 '빵집딸'의 영향이 있었다는 미술사가들의 해석이다.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성모의 자세와 눈빛.
대단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라파엘로의 성모 작품은 모두 마르게리타를 모델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Madonna della Sedia', 1514, Palazzo Pitti, Florence
라파엘로는 1504년 그의 나이 21살에 피렌체로 이사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장점들을 수학하고 드디어 1508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참고로 라파엘로는 1483년생(~1520), 다빈치는 1452년생(~1519), 미켈란젤로는 1475년생(~1564)이니 다빈치와는 30여 년, 미켈란젤로와는 8년여의 차이가 있다.
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동향 출신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당시 브라만테는 바티칸 대 성당의 건축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의 적극적인 소개로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 궁전에 1508년부터 1524년 사이에 '아테네 학당'으로 유명한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을 시작으로 '라파엘의 방(Raphael Rooms)'으로 불리는 3개의 방을 더 완성하게 된다.
그중 마지막 작품인 'Hall of Constantine'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제자들이 완성하게 된다.
'아테네 학당'이 그려진 바티칸의 '서명의 방'(위키미디어)
수려한 외모에 예의도 발랐던 라파엘로를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성격과 재능, 수려한 외모등으로 많은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런 조건에 교황의 신임까지 더해지니 많은 교황청 관료들과 귀족들이 그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의 막강한 후원자들이 되었다.
그러니 라파엘로도 사회적 지위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결국 1514년 비비에나 추기경(Cardinal Bibbiena)의 조카인 마리아 도비지(Maria Dovizi)와 약혼을 하게 되고.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그림 속에 이 둘의 이야기가 실제처럼 그려져 있다.
역시 그림 속에는 그들의 약혼을 멀리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라파엘로의 약혼', 1813,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Walters Art Museum , Baltimore
그럼 위 그림 'La Fornarina'의 마르게리타는 숨겨진 여인?
맞다.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추기경 집안과 약혼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라파엘로가 어떻게 포르나리나를 만나게 되었을까?
당대 미술사가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를 비롯 후대 미술사가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그녀의 집 뒤에 있는 테베레 강가에서 발을 닦는 또는 목욕(?)을 하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설과 그녀 집 앞을 걸어가던 라파엘로가 베란다에서 머리를 빗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시작되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설은 설일 뿐이고 아무튼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은 이랬다.
1512년 당시 라파엘로는 시에나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치지(Agostino Chigi)의 의뢰로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https://brunch.co.kr/@cielbleu/244 참조)의 벽화를 작업 중이었다.
라파엘로의 '갈라테아의 승리'란 그림으로 유명한 바로 그 빌라다.
이곳에서 빌라 옆으로 흐르는 테베레(Tevere) 강변을 따라 5분여를(350여 m) 걷다 보면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의 'Via di Dorotea'라는 거리에 다다르게 된다.
이 길 20번지가 마르게리타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Via di Dorotea 20'번지 마르게리타의 집(위키미디어)
1층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빵집이었고(지금도 입구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기둥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다), 2층에 있는 아취형의 창가가 마르게리타가 머리를 빗었다고 하는 창문이다.
빌라 파르네시나의 벽화를 그릴 당사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가 곁에 없으면 작업을 못하겠다고 꼬장을 부려 주문자 치지는 할 수 없이 빌라에서 둘이 생활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빨리 벽화를 끝내고 싶어서.
피렌체 피티 궁(Palazzo Pitty)을 대표하는 그의 1516년 작품 'La Donna Velata'도 주인공은 마르게리타다.
이 그림의 다른 이름은 '베일을 쓴 여인'이다.
화려한 옷과 베일을 제외하면 머리의 진주 장식이나 그녀가 하고 있는 포즈, 모두 'La Fornarina'와 유사하다.
그런데 말이다. 당시에는 결혼한 여인을 그릴 때만 베일을 씌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La Donna Velata(The woman with the veil)',1516,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1514년 추기경의 조카와 약혼을 한 라파엘로가 1516년 마르게리타와 비밀 결혼을?
1514년 약혼한 라파엘로는 어떻게 2년이나 결혼을 안 하고 있었을까?
라파엘로는 2년이 아니라 이 약혼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연기하던 중 가여운 신부는 18세의 어린 나이에 라파엘로보다 몇 달 먼저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러면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는 1512년 전후부터 거의 1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연인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랑을 나눈 셈이 된다.
간절하면 그 사랑은 더 깊어진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인지 그의 사망 원인을 과도한 애정행각으로 보는 견해들도 많다.
그는 자신의 열병의 원인을 의사에게 정직하게 말하지 않아 잘못된 치료를 받아 더 빨리 사망한 것으로 후대 미술사가들은 전한다.
그가 자신의 열병의 원인을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연인 마르게리타의 처지를 생각했다는 의견이 강하다.
죽어가면서도 루머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녀를 병석에 못 오게 했는가 하면 그녀에게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는 많은 자산을 남겼다니 말이다.
그러나 마르게리타도 라파엘로가 세상을 뜨고 몇 달 뒤(4개월 뒤라고 한다) 그녀가 살던 트라스테베레 지역의 프란시스코 수녀원 (Convent of Santa Apollonia)으로 들어가 수녀가 되고 2년 뒤 세상을 뜬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수녀원은 16세기에 허물어져 현재는 주변의 건물들로 대충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위치는 현재의 세인트 아폴로니아(Piazza sant'apollonia)라는 조그만 광장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출생 연도도 정확지 않아 그녀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 옆에 브라만테가 지은 'Palazzo Caprini'에 거주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로마시의 도로 건설로 1938년 철거(도로 건설로 르네상스 시대 건물을, 그것도 라파엘로가 살던 건물을 철거하는 여유 있는 그들이 부럽다.)되고 없지만 그 옛날에는 '라파엘로의 궁'이라고 불리던 건물이었다.
Palazzo Caprini, 1549, 작자미상, Metropolita Museum of Art, NY(위키미디어)
'La Fornarina' 원본은 이 궁의 은밀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사후에 그림을 보게 된 수제자 '쥴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는 여인의 왼손 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라파엘로의 명성을 걱정하게 된다.
혹여나 스승의 명성에 흠집이 날까 싶었던 그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위에 덧칠을 하여 반지를 지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에스테 로더의 후원하에 레이저 투시로 검사한 결과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여인과 라파엘로의 관계가 더욱 확실시되면서 그의 사후 500여 년이 지나 그가 가장 사랑했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한 마르게리타 루티가 대중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오게 되었다.
우연일까?
라파엘로는 굿프라이데이(부활절 전 금요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에 태어나 굿프라이데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계적 위인은 하늘이 낸다고 하는데 우연의 일치 치고는 상당한 우연이지 싶다.
라파엘로는 로마의 판테온에 약혼녀 마리아 곁에서 영면에 들었다.
판테온에 안장된 라파엘로와 약혼녀 마리아의 묘(위키미디어)
지금 'La Fornarina' 그림은 라파엘로의 수많은 명작들 사이에 가장 이야깃거리가 되는 작품으로 라파엘로의 사후 100년경인 17세기부터 바르베리니 가문의 소장품이 되어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Palazzo Barberini)에 전시되어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르베르니 궁 전경(위키미디어)
남녀 간의 애정사를 타인이 시시콜콜 알 수는 없다.
본인들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의 이야기를 그의 작품과 당시 미술사가들의 전언으로 짐작해 볼 뿐이다.
라파엘로는 그의 연인에게서 이성의 감정을 넘어 따뜻한 어머니의 정까지 느꼈음을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성모 작품에서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그 앞에 섰을 마르게리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화폭에 옮겨 놓았다.
그의 손을 거쳐 여러 모습으로 아름답게 세상에 남은 마르게리타 루티.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게 될 그가 남긴 작품들은 라파엘로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