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바다 건너 영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역 ‘노르망디(Normandie)’.
원래 켈트 족(https://brunch.co.kr/@cielbleu/57 참조)이 살고 있었으나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9세기경에는 북유럽의 바이킹 족들에 의해 침략당한 후 ‘북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불리게 되면서 ‘노르망디’란 명칭이 굳어졌다고 한다.
노르망디는 북쪽을 ‘Haute-Normandie’, 남쪽을 ‘Basse- Normandie’라 나누어 부르며 각각의 주도는 루앙(Rouen)과 캉(Caen)이다.
루앙(Rouen)
이번 이야기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Haute- Normandie’의 주도(capital) 루앙 이야기다.
루앙은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도시로 문헌에 남아 있으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0세기경 바이킹의 침략 때부터라고 한다. 파리와 대서양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으로 교역의 중심지에 있었던 루앙은 로마 시대의 이름이 ‘라투마코스(Ratumacos:trading centre)’였다고 하니 아마도 그 옛날부터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나 보다.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으로 유명한 정복 왕 윌리엄 1세는 루앙을 기점으로 세력을 키워 1066년 영국 정복에 성공하고 영국의 노르만 왕조를 시작한 장본인이다.
결국 그의 영국 정복은 후에 백년전쟁의 불씨가 되긴 하지만.
백년전쟁(1337년-1453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빌미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 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뜨자 영국의 에드워드 2세의 부인이었던 이사벨라(그녀는 샤를 4세의 누이다)가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나라는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왕실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왕실의 영토보다 더 많았으나 서열로는 영국 왕의 서열이 프랑스 왕보다 아래였다고 한다.
‘사자 왕 리처드’의 어머니인 에리아노(Eleanor of Aquitaine:1137-1204)가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지금의 보르도 지역)을 몽땅 결혼 지참금으로 가지고 영국의 왕비가 되었던 것도 두 왕실 간의 영토 역전에 한몫을 했다. 당시의 제도는 결혼을 하면 여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나 재산은 모두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서열은 아래지만 영토는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늘 프랑스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당연히 들었을 테고 프랑스 왕은 자신보다 세력이 큰 신하를 두고 있는 것이 영 불편한 상태였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영국령 영토를 많이 회복하긴 했으나 영국인을 그들의 영토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잔 다르크라는 영웅을 내놓으면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지만 백년전쟁 후에도 노르망디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루앙 대 성당
루앙 노틀담 대성당
루앙 에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연작으로 유명한 루앙 대성당(Notre-Dame Cathedral)이 있다. 이 성당은 1150년경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240년에 완공되었지만 아직도 크고 작은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한다. 유럽의 대 성당들은 완공에 수 백 년씩 걸린 곳들이 많아 완공에 긴 세월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놀랄 이야기가 아니다.
흰 깃발이 걸린 검은 빌딩의 2층이 모네의 작업실이었다.
모네는 이 성당의 맞은편에 있는 1500년대 초에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인 ‘Finance Office’(현재는 1층에 관광안내소가 있다.)라고 불리던 건물의 2층 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성당의 모습을 모두 28편 그렸다. 그러나 그가 사인한 작품은 20개라고 한다. 우리의 눈에는 비슷하게 보여도 대가의 눈에는 미묘한 차이로 완성도가 달라졌으니 모네가 연작의 대가임은 이곳 루앙에서도 증명되고 있었다.
루앙의 대 성당은 사자왕의 무덤과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가지고 있는 성당 자체 명성보다도 모네의 연작의 대상으로 더 유명세를 타는 듯하다. 안내를 하는 가이드도 성당에 대한 설명을 '모네가 그린 성당'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자왕의 무덤은 사실은 사자왕의 심장을 보관했던 조그만 납으로 만든 상자인데 1838년 성당의 발굴 작업 중 발견된 것이다. 중세에는 귀족들의 매장 방식이 좀 특이하여 사체를 분리하여 몇 군데 묘를 만드는 것이 트렌드(?)였다고 하니 별 이상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프랑스 왕 중 유일하게 성인에 오른 루이 9세는 십자군 원정 중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시신을 100여 개로 나누어 도처에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조금 다른 이유이긴 하나 프랑스 왕가의 묘인 생 드니 성당에는 기요틴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루이 17세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모네의 루앙성당 연작(좌로부터 아침,점심,저녁)
대 성당을 지나 루앙의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대시계 길(Rue du Gros-Horloge)’에는 바늘이 하나밖에 없는 ‘대시계(Gros Horloge)’라 불리는 커다란 시계가 고딕 양식의 석탑에 장식되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이 시계는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계의 바늘은 시간을 나타내고 숫자판 밑으로는 매일매일의 수호신(프랑스에는 일 년 365일의 수호신이 정해져 있다)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져 있다.
성당에서 구 마르세길로 이어지는 대시계길
시계탑 밑에는 르네상스 식으로 만들어진 터널이 있는데 여기를 통과하면 루앙의 관광 중심지인 구 마르세 광장(Place du Vieux-Marche)에 도착하게 된다.
터털 천장을 올려다보면 16세기경 만들어진 양에 둘러 쌓인 양치기 부조물을 볼 수 있다. 예로부터 루앙은 영국에서 수입한 양모로 울 산업이 번창했던 도시답게 세례 요한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의 부조물로 이 곳이 울 산업의 도시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 부조물은 각 지역의 수작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파리의 박물관(La 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에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대표성이 있는 작품이다. 터널을 통과할 때 머리를 들어 꼭 천장을 보자.
대시계와 시계밑을 통과하는 터널과 터널 천장의 루앙의 상징 부조,루앙의 도시문장
잔 다르크 교회
이 터널을 지나 ‘구 마르세 광장’에 오면 희한한 모양의 건축물이 오른편에 보인다. 바로 잔 다르크 교회다.
<잔 다르크의 화형>,1843,hermann Stilke,에르미타쥬 박물관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를 기적적으로 구해내지만 프랑스의 배신으로 영국에 넘겨지게 되어 마녀재판으로 이곳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바로 교회가 세워진 자리가 그녀가 1431년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진 곳이다. 그 녀는 한 번도 아니고 사후에도 두 번이나 더 불에 태워졌으며 타고난 재는 센 강에 뿌려졌다. 불길에 휩싸이며 그녀는 추종자들에게 십자가를 그녀 앞에 들고 있을 것을 명했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집행관은 참혹한 광경에 자신에게 저주가 돌아올까 봐 무척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1920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녀로 시성 되었다.
이 교회는 1979년 건축가 루이 아레취(Louis Arretche:1905-1991)가 지어 그녀에게 헌납된 것인데 교회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건물 지붕의 곡선은 잔 다르크를 화형 시켰던 불꽃을 의미하기도 하고 뒤집어진 바이킹의 배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교회를 이렇게 뒤집어진 배 모습으로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잔 다르크 교회 외관
이 교회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교회 안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다. 교회의 외관은 현대식이지만 건물 안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역사가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루앙에 있었던 ‘생 방상(Saint Vincent) 교회’에서 옮겨 온 16세기 작품이다. 이 교회는 1944년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스테인드글라스는 훼손을 우려해 다른 장소에 보관하여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로 보관하고 있던 16세기 스테인드글라스를 잔 다르크 교회를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야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신비하지만 이곳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교회 건물은 무려 400년의 시간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신구의 조화가 절묘하다.
잔다르크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교회 내부
구 마르세 광장의 또 다른 명소
라 쿠혼느에 걸린 태극기
잔 다르크의 교회 바로 건너편에는 만국기를 휘날리고 있는 이 지역 특유의 반 목조 건물이 보인다.
만국기가 걸려 있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 태극기 찾기다. 있다.
보는 마음이 뿌듯하다.
건물 앞에는 ‘라 쿠혼느(La Couronne:왕관)’라는 식당 간판이 우뚝 서 있다.
이 식당은 미슐랭 가이드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프랑스 정통 레스토랑으로 그들의 역사는 13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일 설에 의하면 이 곳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요리를 맛 본 쥴리아 차일드(Julia Child: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 '쥴리아 차일드'의 그 주인공이다)가 큰 감동을 받고 프랑스 음식을 배우기로 결심하게 된 식당이라고 한다.
노르망디의 독특한 건축물
'라 꾸혼느'의 건물도 그렇지만 이 지방은 ‘반 목조 건축물(Half-timbered houses)’이라 부르는 특이한 형태의 집들을 짓고 있다. 유럽 여행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런 식의 건축물은 15세기경부터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루앙 주변의 방대한 오크(Oak) 숲의 영향으로 반 목조 건축물은 이 지역의 대표적 건축 양식이 되었다고.
루앙 구 시가지의 좁은 골목
이런 식의 건축물이 지어진 것은 좁은 골목길로 인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루앙의 구 도시 지역을 거닐다 보면 좁은 미로 같은 골목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는 집의 일층은 돌로 짓고 그 위에 반 목조 집을 짓는 식으로 양식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집의 형태를 보고 얼마나 오래된 집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반 목조 건축물은 독일과 알자스 지방, 영국에서도 볼 수 있다.
'Rue de petit-mouton'에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위키미디어)
루앙의 집들 중에는 무려 2000개의 통나무를 사용한 집도 있다고 한다. ‘Rue du Petit-Mouton’에 가면 빨간색으로 칠해진 루앙에서 가장 오래된 반 목조 건물이 있다.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이곳에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와 폴 사르트르(Paul Sartre)가 살았다고 해서 루앙 방문객들은 한 번씩 들러보는 장소다.
루앙의 대표 도자기 훼이엉스
반 목조 건물들을 감상하면서 걷다 보면 루앙의 대표 도자기인 훼이엉스(Faience)가게들을 만나게 된다.
훼이엉스는 예부터 울과 함께 루앙의 대표 교역 상품이었던 도자기로 파리의 세브르(Sevres)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자기는 아니나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질그릇인데 전문 아티스트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넣는 시연을 하는 가게들도 있어 특별함을 더해준다. 가격은 생각만큼 착하진 않다.
훼이엉스 가게와 작업 중인 아티잔
루앙 출신 유명 인사들로 우리도 익히 아는 인물 들의 이름이 보인다.
‘보봐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괴도 루팡’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 그리고 낭만주의 화풍의 선두주자로 ‘메듀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을 그린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고향이 바로 루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