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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 Apr 04. 2024

융의 집단 무의식과 글로벌 연대

인간이니까 공유하는 것들에 기반하여.

지난 글에서 헬레니즘(제국)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도왔던 스토아 철학덜 생산하고 덜 발전하는 삶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얘기해 봤었습니다. 미니멀한 삶은 개인의 영역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게 사회적, 구조적 변화로까지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사회의 수준으로까지 물질적 절제와 내면의 평화를 확산시키려면, 우리에게 어떤 철학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기 때문에 인간 공통의 과제를 직면하고 협력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라고 봐야 할까요? 속단하기에는 이릅니다. 만약 우리 개개인이 겪는 내적 변화가 어느 정도 공통적이라면, 개인의 변화가 쌓여서 사회적 변화를 이룰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글에서는 융이 제안했던 집단 무의식에서 글로벌 연대의 단초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집단 무의식 


칼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은 인간의 심리적 깊이를 탐구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융은 인간이 공통의 심리적 유산을 공유하며, 이를 통해 깊은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집단 무의식을 한 단계 더 파고 내려가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형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원형은 어떤 문명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반복되는 이미지(영웅, 엄마, 아이, 현자 등)로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 공통의 조상님으로부터 받은 심리적 유산이죠. 그림자는 숨기고 싶은 욕망, 감정, 특성들인데 공격성, 문화적 편견, 자기기만, 금기된 욕망 등이 있을 수 있겠죠. 그림자는 문화나 개인에 따라 좀 더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집단 무의식이 마음속 이미지(심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의식이 발전하는 순서는 감각에서 이미지로, 이미지들의 연결과 명명을 통한 생각(의식)으로 발전하는데, 집단 무의식은 의식으로 발전하기 전의 형태인 이미지의 모습을 띄는 것이죠. 인간이 잠을 잘 때(렘수면) 이미지들을 봅니다. 말이 되지 않는 이미지들을 재생함으로써 마음이 다시 정돈되는 것이죠.


집단 무의식은 가끔 그림자와 동일시되어 파괴적이고 어두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치판단을 잠시 밀어 두고 생각해 본다면, 집단 무의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디폴트 프로그램이며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릴 때는 “생각이 난다(집단무의식)”였다가 어른이 되면 “생각을 한다(개인의식)”가 되는 거죠. 물론 어른이 되어도 종종 그냥 생각이 나고, 행동을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무의식이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인간을 고양시키는 원형의 대표적인 예로 “영웅”이야기가 있는데,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강력한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영웅신화인 헤라클레스는 광기에 휩싸여 가족을 살해한 후 이를 속죄하기 위해 12가지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수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용기, 지혜, 끈기, 희생 등의 덕목을 배우며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죠. 




영웅서사와 글로벌 연대의 성장드라마


이기심이나 어리석음으로 일을 망치고 나서 이를 극복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현대의 인간이 직면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현재 전 세계가 직면한 주요 도전과제는 지속 가능한 발전, 빈곤 감소, 기후 변화 대응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 연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영웅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어느 문화나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이라는 점이고, 많은 문학과 영화에서 개인들의 성장드라마도 영웅서사를 따라갑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생활하다가, 모험이 닥치고, 초반에는 모험을 거부하지만 멘토의 도움을 받아 모험을 시작합니다. 영웅의 모험은 시련을 겪지만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최고의 시련에서는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합니다. 시련을 극복한 영웅은 지혜와 보상을 얻고 귀환하고 이를 통해 일상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한 영웅'에서 발췌 요약)  


세계 대전 후에 시작된 글로벌 연대를 영웅서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습니다. 국가 간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최초의 국제기구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했습니다. 모험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것이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국가들은 '국제협력'이라는 모험에 제대로 뛰어들게 됩니다. 유엔(UN)이 설립되었고,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 촉진, 인권 보호에 중점을 둔 다양한 국제기구와 협약이 생겨났습니다.

국제협력은 경제적 영역으로 눈을 돌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창설로 귀결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운동과 남아프리카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은 인권 보호를 위한 국제협력이 강화됩니다. 1970년대 환경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1988년 IPCC가 만들어지고 2015년 파리에서 기후변화당사국들이 모여 기온 상승을 1.5도 이하로 제한하기로 합의합니다. 2020년 이후 겪은 판데믹은 보건 분야의 위기(모험)를 만나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 세계적인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강화되고, 개인이나 개별 국가를 넘어선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실패나 한계가 있었고, 지금의 기후변화 협약도 목전에 걸린 각자의 이해관계(선거, 산업의 보호 등)를 우선하느라 언제나 갈지자걸음을 걷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강해질수록 좀 더 절실히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2년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loss and damage을 선진국들이 처음으로/공식적으로 인정했고요. 영웅신화에서처럼 초고난이도의 시련을 만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해야 다들(나를 포함) 정신을 차릴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끔 개인적으로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개인과 개별 국가에 가장 똑똑한 해답을 찾는 것도 좋지만, 그런 '똑똑한 생각' 이전의,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심리적 유산으로 돌아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 가능할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국제심리학' 또는 영화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심리역사학'으로 명명해야 할 것 같네요. 약간 허무맹랑한 것 같지만, 오늘의 이야기가 글로벌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기후변화에 대한 좋은 소설 하나가 수많은 협약보다 더 영향력이 클 수 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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