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나왔을 때 첫 도시가 런던이었어.
다들 가지고 있는 영국 런던에 대한 이미지 하면 신사의 도시잖아?
막상 가본 런던은 불친절했고, 차가웠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4년 만에 간 런던은 예상했던 그대로였어.
차가웠고, 딱딱한 딱 도시 그 자체였지.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어.
런던에 오기 전 공항에서 노숙을 한 탓에 몹시 피곤한 상태였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자버리기엔 시간이 아까웠어.
뭐라도 하자고 생각해서 거리로 나갔어.
걷다 보니 코벤트 가든과 차이나타운을 지나쳐 소호에 다다랐어.
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바빠 보였어.
가운데 홀로 있으려니 울적함이 나를 사로잡았어.
영국은 다 비싼 게 흠이지만 박물관들이 무료라는 게 가장 좋았어.
아마 다른 나라에서 약탈해온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양심상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돈 없는 여행자인 나에게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어떤 날은 전쟁박물관으로.
어떤 날은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으로.
어떤 날은 영국박물관으로.
어떤 날은 내셔널 갤러리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매일 내셔널 갤러리에 갔어.
좋아하는 그림 앞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기도 했고,
내셔널 갤러리 앞 광장에 앉아서 거리 공연을 구경하기도 했고,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인 동행에게 그림 설명을 해주기도 했어.
어떤 이들은 요플레 뚜껑만 핥아먹는 식으로 둘러보는 박물관인데.
나는 통에 담긴 요플레를 퍼먹은 격이니.
그것도 코스트 X에나 파는 커다란 통에 담긴 요플레 같은.
돈을 쓰지 않아도 사치스러운 게 뭔지 알게 된 나날이었어.
모로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동양인이 여기에는 얼마나 많던지.
서울 명동을 거닐고 있는 줄로 착각이 들 정도였어.
반가운 마음에 동행을 구해 해질 무렵이면 타워브릿지로 갔어.
양손 가득 캔 맥주를 사들고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며 밤을 기다렸어.
밤이 되어서야 진정한 타워브릿지의 멋이 드러나거든.
그 멋에 반해 며칠 밤을 거기서 보냈지 뭐야.
포르투에는 도루 강이, 파리에는 센 강이 있다면 런던에는 템즈 강이 있어.
여자든 남자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풍경을 보며 런던에 대한 로망을 키웠을 거야.
템즈 강을 따라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빅벤이 보이곤 했어.
누구나 꿈에 그리던 빅벤을 눈 앞에 마주했을 때 깜짝 놀랐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와서 빅벤이 보수 공사 중이라는 걸 눈으로 보고서야 알았거든.
보수 중인 빅벤 앞에서 굳이 사진 찍을 필요는 없겠다 생각했어.
그때 문득 그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
“잘 못 찍힌 화폐가 더 가치 있어.”
하긴 보수 중인 빅벤을 보는 것도 평생에 있을까 말까 한 일이잖아.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어.
사진 속 빅벤은 보기엔 좋지 않았지만 가치 있었어.
외국인에게 맡긴 사진은 예상대로 구렸지만 말이야.
그와 처음 가보는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들었던 프리워킹투어를 이번엔 혼자 들었어.
당연히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는 나를 똥 멍청이로 만들었지.
3시간 동안 알차게 따라다닌 투어.
알아듣는 게 없으니 기억나는 것도 없었어.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런던을 거닌다는 건 좋았어.
이 커다랗고 바쁜 도시에서 혼자 있는 건 너무 외로웠거든.
복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고 싶었어.
지하철을 타고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내려서 버스로 갈아탔어.
도착한 곳은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메이필드 라벤더 팜’이었어.
메이필드 라벤더 팜은 이름 그대로 라벤더 농장인데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기로 유명해.
내가 초록색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가득 차 있고, 코 끝엔 진한 라벤더 향기가 감돌았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지.
포르투에서 그가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걸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워서일까.
그가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어.
그렇게 홀로 사진 찍는 연습을 시작했어.
삼각대를 세우고, 타이머를 설정했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채도도 건드려 보고, 색감을 만져도 봤어.
사진 좀 찍는다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성할지라도 내 첫 작품은 나름 만족스러웠어.
잘 연습해서 나중에 나도 그를 찍어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쪼리 슬리퍼.
아디다스 레깅스.
박스 티셔츠.
앞 뒤로 맨 배낭.
이 모습으로 거닌 런던은 참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어.
창피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어서 이 도시를 떠나고 싶었어.
조금 더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다시 오고 싶었거든.
그를 만나 여행을 잠시 멈춰서,
비행기 표가 너무 비싸서,
이래저래 미뤄왔던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
튀니지.
이름만 들어도 낯설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