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로 사계리를 여행하며 느낀 점
그제 새벽에 일어나 문득 '제주도 가볼까?'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움직여 폰을 찾았다. (뇌에서 손까지 가는 시간 3분) 쓸 일 없어 지워버린 항공사 앱 재설치. 나는 기억 못 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똑똑이 사과폰이 알아서 찾아주어 로그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더랬다. 그동안 쌓아둔 마일리지가 두둑해서 혹시나 하고 마일리지 항공권을 조회했더니, 역시나 날 위한 시간대에 좌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예매해야지. 그렇게 8천 원으로 항공권 예매를 마치고 나니 공항까지 갈 일이 걱정이다. '요즘 공항버스 다니는 걸 못 봤는데?' 조회해 보니 임시 잠정 중단이란 문구가 보인다. 윽. 결국 비행기보다 4배쯤 비싼 택시를 타게 됐다. 그래도 열선 깔린 따뜻한 뒷좌석에 앉아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하니 마냥 아깝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공항과 비행기 안은 늘 그렇듯 설렘과 기대감으로 들뜨고 소란스럽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겐 좀 많이 소란스럽게 느껴질 즈음, 검색대 직원과 제주공항버스 기사님의 사무적 태도가 그런 들뜸을 상쇄시켜 주는 듯해 되려 반갑게 느껴졌다.
오늘 제주도 여행의 목적지는 한 곳, 산방산 근처 [사계생활]이다. 이곳에서 3일 간 하는 [산방산 아트 앤 북페어]를 보고 싶어서다. 어쩌다 보니 토요일 새벽 비행기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 돼버려 아쉽지만 하루라도 온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오늘의 목표는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디자인 감각도 배우고(디자인에 문외한임), 3년 간 월간지에 기고했던 내 글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고 싶은데 샘플 삼을 만한 책 찾아보기다.(아무도 내 글에 관심이 없어서 자력으로 만들 계획임)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오자는 부수적인 목표도 세웠는데...... 그런데 또 제주의 자연은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서울 가기 싫어진다는 게 함정이긴 했다.
이동 시간을 제외하고 오롯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 6시간쯤 된다. 아직 오픈 전이라 동네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설렁설렁 걷는데 내 옆을 지나치는 렌터카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보조석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제주의 바람을 느끼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는 손짓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녀의 모습에 문득 키치한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혼자 여행하면 생각이 깊어지는 타입) 제주 여행=렌터카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도 크게 자릴 잡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짧은 시간과 많은 경험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면 렌터카는 당연한 결과값이다. (과거 2번의 제주 여행을 그렇게 다녀왔더랬다.) 하지만 많은 경험을 하나의 경험으로 변수를 준다면?
시속 60~70킬로로 달리는 차 속에서 느끼는 제주의 풍경도 충분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제주를 키치하게만 아는 건 아닌가 싶다. 대중교통과 뚜벅이 여행을 하고 내 욕심을 좀 덜어내고서 본 제주(정확히는 사계리의 일부)는 작지만 매력적인 풍광이 꽤 많다는 걸 알게됐다.(예를 들면 사계리엔 배추밭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동네 정자에 누워보면 바람소리며 특이한 새소리가 들려 마음이 평안해진다. 자음이 몇 개 사라졌어도 무슨 간판인지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을 찾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로운 값을 얻게 된 셈이다.
커피를 마시며 노트에 감상을 끄적거리고 있는데 통창 밖으로 대형버스, 밴, 렌터카들이 씽씽 달린다. 그들에게도 이런 작고 적은 여행을 권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제주의 자연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키치하지 못하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뚜벅이로 걸어 다니며 조금 더 깊고 내밀한 것을 보고 느껴보면 어떨까? 키치하지 못한 제주여행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