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ya Jul 10. 2019

1년의 학비 20만원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학교에 꼭 갔으면 좋겠다.

평온함 뒤에 가려져 있는 현실 속 가난과의 싸움.


눈에 보이는 가난의 현실을 나는 계속 피하려고만 했다. 가난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로 주민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내 판단과 기준에 맞추어 이들을 대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이었다. 분명 ‘나’ 란 존재가 개입되기 전, 충분히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그 나름의 ‘삶’을 이끌어 왔을 텐데.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젊은 외국인 청년이 변화를 일으키고자 이곳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현지인과 같아야 한다는 그런 부담과 압박감이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 살면서 지역에 살고 있는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에 괜한 바지에 구멍을 내고 펌프장에서 물을 거르지 않은 채 그래도 퍼다 마시고 좋아하는 과일을 먹는 횟수도 일부러 줄여 나갔다. 주민들이 나를 ‘돈’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나만의 괜한 두려움이었을까? 내가 아닌 주민의 일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우리는 어차피 다른 배경을 가지고 다른 환경의 삶을 살고 온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억지의 나를 끼워 맞추는 것이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지역주민들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하는 이웃들, 주민들을 바라보니 그들의 숨어 있던 현실이 차차 보이기 시작했다. 


 

1년의 학비 20만원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학교에 간다는 것’은 늘 희망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텔레비전 광고 속 메시지처럼 아주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곳에도 학교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정식교사도, 교과서들도 있다.  그럼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곳, 레소토의 정규교육과정은 초등학교 7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으로 진행된다. 국가의 전 지원을 받는 초등학교의 경우 무상교육으로 누구에게나 그 혜택이 주어진다. 아무리 먼 산속 마을 출신이라도, 형편이 어려운 아이라도 정부와 다른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으며 매일을 학교에 갈 수 있다. 하지만 7년의 교육 후, 학생들의 미래는 갈린다. 중등학교부터는 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직접 학비를 내고 본인의 고등교육 진학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보통의 중등학교 학비는 1년에 약 한화 20만원 돈. 물론 학비 외에 교복, 교과서, 시험등록비 등의 기타 항목이 추가로 필요하다. 대부분의 시골 주민들에게는 이 적은 학비를 낼 형편이 안 된다. 특히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고아들에게는 정부에서 중, 고등교육으로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장학금 제도가 있다. 무조건 고아라는 이유로 학교에 보내기에는 그 수요가 엄청나기에, 뜻이 있고 직접 준비를 하는 의지가 있는 아이들에게만 기회를 제공한다. 즉, 중등교육에 입문하는 신청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다. 준비해야 할 서류들도 많다. 초등학교 졸업장, 교장 혹은 담임 선생님의 추천서, 마을 대표의 추천서, 부모님 사망서, 본인 출생서 등. 이 모든 서류들을 들고 교육부의 문을 직접 두드려야 정부의 관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홀로 남겨진 아이들의 경우, 부모님 사망 증명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이 많은 서류들을 직접 준비해도 교육부에 신청을 위해 수도로 나오는 교통비가 없어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돌봐주는 부모님이 옆에 없고 그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음을 잃어가는 두 소년을 만났고 그들에게도 당연한 권리인 ‘학교에 가는 기쁨’을 전해주고 싶었다.  필요한 서류를 함께 모아 레소토 정부로부터의 장학금 신청을 도와주게 된 것이다.



떼꼬마을에서 만난 2명의 동생들, 음포와 라뿔라니


레소토에서의 3번째 사업장인 떼꼬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학비가 없어 마을에 남아있는 두 소년을 만났다. 한참 엄마가 해 주는 집 밥을 먹으며 성장해 나갈 나이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마을에 남겨져 있었다. 부모가 없이 홀로 살아가는 어린 아이들을 보고 처음부터 가슴이 찡해 왔다. 누군가의 빈자리가 얼마나 느껴질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는 그 억제의 감정을 어떻게 참고 살아갈까? 

Ha-Teko village @Juyapics, 2016


학교에 간다는 것, 특권을 받은 아이들만이 누리는 혜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잠시 내 시각과 잣대를 가지고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일방적인 걱정과 염려 대신 오히려 그 누구보다 본인의 삶에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재산인 초가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음포(13세)와 어머니를 잃고 오랜 탄광일로 청력을 잃고 벙어리가 된 병든 아버지와 둘이 살아가는 라뿔라니(13세). 학교에 가지 못하는 대신 이웃 주민들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소년에게도 누구에게도 말 못할 가슴 속 유일한 희망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음포가 꼭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음포와 라뿔라니 2명의 학생을 모두 도와주고 싶었지만 양쪽 부모를 모두 잃은 음포를 먼저 도와주게 되었다. 음포는 초등학교 졸업 당시 학급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강한 집중력과 끈기를 가진 아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음포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도움을 직접 주기로 하였다.


음포와 같이 양쪽 부모가 없는 고아들을 대상, 레소토 정부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 온갖 서류를 들고 쫓아 다닌 지 3개월이 넘었다. 필수 서류 중 하나인 엄마의 사망증거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라고는 형 한 명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몇 년 전 일자리를 찾아 마을을 떠나고 철저히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의 사망증명서 따위는 어디 보관되어 있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시 나는 레소토 유네스코국가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교육부 및 다른 정부기관들과 긴밀히 일하고 있었지만 정부에서 요구하는 공문서를 처리하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음포의 장학금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개인이 준비해야 하는 것들로 내가 직접 나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일단 잃어버린 엄마의 사망증명서를 새롭게 신청하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신청하는 데도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고 이를 하나라도 빠뜨릴 시에는 신청 자체가 불가능했다. 인터넷으로, 간단한 팩스로 순식간에 공문서를 원하는 때 신청하고 받아낼 수 있는 한국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었다. 


내 부모의 사망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마을 대표의 자필 편지가 요구되었다. 이와 함께 엄마의 장례를 치른 장례식장에서의 확인 문서도 따로 필요했다. 제대로 엄마 장례를 치른 기억도 없기에 이 방법도 음포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를 대신하는 방법으로 마을 내 이웃 3인의 서명과 자필로 적힌 편지를 받아오라고 한다. 그들의 신분증 사본과 함께 말이다. 


그 무엇 하나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3개월이 넘게 걸렸지만 어렵고 복잡한 준비과정을 끝내고 음포의 중학교 진학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다행히 음포의 중학교 합격소식 소문을 들은 수도에 살고 있던 음포의 친척이 학교 통학에 가까울 수 있도록 거주지를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음포의 성실함과 학교에 가고자 하는 끈기를 보고 레소토 국가위원회 사무총장님도 중학교 입학선물로 공책, 연필 등이 포함된 각종 학용품을 직접 선물해 주었다. 


당시 사업을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이는 나의 역할과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외국인으로서 음포를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보다 마을에 같이 지내는 동네 누나로서 그의 어려운 상황을 눈 감고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많은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것을 첫 번째 디피링 마을에서 생활하며 직접 배울 수 있었기에, 내가 받아온 이웃들의 사랑과 감동을 나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나누며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 09화 우리 마을의 가장 큰 변화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