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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Mar 01. 2021

요리의 설계도 '레시피'

1990년대 후반 나는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했다.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중남부 독일과 스위스를 주로 여행한 것이었다. 생애 첫 독일 여행에서 여러 가지가 놀라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깜짝 놀란 게 있다. 고딕성당을 비롯한 건물들이다. 내가 여행했던 독일 남서부 도시 프라이부르크의 한 건물 벽에는 ‘Seit 11**’라고 쓰여 있었다. 


가이드를 해 주던 동생에게 물었다. 1100년대에 지어졌다는 뜻이야? 그래요. 그게 아직 남아있어? 네, 아까 본 성당도 13세기 건물이었잖아요. 그런데 이 건물은 다시 지은 거예요. 응???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졌는데 지하에 건물 설계도가 있어서, 그거에 따라 다시 지었다는 거예요.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기엔 실익이 너무 적어 보여서, 사실이라고 믿었다. 자, 도입부는 여기까지.


레시피는 요리의 설계도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음식은 반복, 재현된다. 한번만 만들어진 후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음식은 맛을 포함하여 무언가 문제가 있는 음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음식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내가 다시 그 음식을 만들려고 해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만약 그 음식을 만들려고 하면 더더군다나 ‘설계도’가 필요할 것이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조리법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에게는 설계도가 필요 없겠지만, 그 전 단계까지는 설계도가 필수다.


과거에는 이 요리의 설계도를 조리법, 혹은 요리법쯤으로 불렀을 텐데, 요즘은 거의 모두가 레시피라고 한다(그렇다면 레시피는 외래어인가, 외국어인가.) 대세를 따라 여기서도 조리법 대신 레시피라고 하겠다.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까봐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될까봐 그렇다.


나는 내가 처음 만드는 음식들은 대부분 그 레시피를 기록해 놓는다. 2인 식사를 기준으로 한다. 자주하는 음식이야 나중에는 레시피가 필요 없지만, 가끔가다 하게 되는 음식은 레시피가 있으면 유용하다. 내 나름의 레시피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신데렐로'가 직접 만든 음식 몇 가지. 사진을 보자니, 촬영용 그릇부터 조명까지 여러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달래 무침>

달래 1팩/간장1T/마늘0.5T/식초0.5t/고춧가루1.5T/올리고당1T/참기름1T

▶달래를 깨끗이 씻는다.(흙이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 씻는다)/양념장을 준비한다./달래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다./양념장과 달래를 섞어 무친다. 끝.


처음 음식을 만들 때 정리한 레시피인데 지금 보니 우습다. 1팩이라는 용량도 그렇거니와 T와 t의 구분이 제대로 됐는지 의아하다. 이대로 음식을 만들면 과연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게다가 ‘흙이 더 이상 안 나올 때까지 씻는다’라는 TMI는 도대체 무얼까. 전체적으로 엉성한 내용에 비해 ‘끝’자가 눈에 띄게 다부지다.


<소고기 볶음>

소고기 200g/다진 파 상당량/다진 마늘2t/국간장1T/진간장1.5T/참기름/후추

▶참기름과 후추를 제외한 재료를 모두 넣고 WOK에서 볶는다./중간중간 고기가 뭉치지 않도록 숟가락으로 으깨서 풀어준다./다 익어가면 후추와 참기름을 넣고 조금 더 볶는다. 끝.


달래 무침보다는 조금 진화한 느낌이다. 끝자는 빼놓지 않는다.


<코다리 조림>

냉동 코다리 7~8 조각(약450g)/무 조금/마늘/파/국간장(2T)/진간장(2T)/올리고당(3T)/고추장(1t)/고춧가루(1t)/설탕 약간.

▶차가운 물에 코다리를 2~3번 씻는다./각종 양념을 섞어 놓는다. 양념의 3분의1 정도를 넣고 먼저 무를 졸인다./5분 이상 졸인 후 코다리를 넣고 졸이기 시작한다. 이때 남은 양념의 1/2을 넣고 졸인다./중불에서 졸이고, 중간중간 양념을 끼얹는다./10분쯤 졸인 후(총15분) 남은 양념장을 모두 넣고 계속 끼얹으며 졸인다./파를 넣는다./전체적으로 20분 이상 졸인다.


확실히 진화했다. 이렇게 만들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끝 자는 어디 갔을까.


레시피 적기는 귀찮은 일이지만, 귀찮음을 무릅쓸 만큼 중요하고 유용하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파일을 열면서 파일명을 보니 ‘실전 조리법’이다. 실전이라는 결연한 단어도 우습지만, 엑셀로 만든 자료에 조리법은 뭔가 부조화스럽다. 실전은 살리고, 조리법은 레시피로 고쳐야겠다. 실전 레시피,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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