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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Mar 18. 2021

군대와 라면

라떼 시절 이야기다. 남성들이 하는 이야기 중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첫 손에 꼽히는 게 군대 이야기다. 남자들이 몇 명만 모이면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이자 여자들이 혐오하는 주제, 군대 이야기. 군대 다음으로 싫어하는 이야기는 축구 이야기다. 둘 사이에 콜라보가 일어나면, 최상급이 탄생한다. 바로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로 라떼 시절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요즘은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간 여성들이 군대에 관한 각종 정보를 교환하는 ‘곰신 카페’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 그런 카페가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 들었지만, 그 카페에 들를 일은 없었다. 여성도 아니고, 군대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고. 그러다 카페에 들어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남자들 사이에서나 주고받을 법한 군대 이야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자들끼리 나누고 있었다. 남자들의 계급이 여친의 계급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도 놀라웠다. 남친이 제대한다고 자랑하면, 선망과 축하가 넘쳐난다. 여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혐오한다는 건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다음 축구 이야기. 이건 2002년 우리나라 월드컵 때 완전히 정리됐다. 지금도 눈에 선한 그 붉은 옷의 물결. 그 해 여름, 우리나라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은 차를 갖고 출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출근해서 좀 걸어가야 했다. 걷는 길이 시청 광장을 지나 명동으로 가게 돼 있었다. 오후 2시에 경기가 있는데 아침 8시 반에 시청 광장은 붉은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들의 절반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면 여성들이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가 된다. 


강렬한 기억은 오래 가는 법. 라면하면 떠오르는 기억 앞 머리에는 군대가 있다. 하지만 군대와 라면 이야기를 하려니, 이유없이, 괜스레, 뭔가 부담스러워 해묵은 농담을 끌고와 보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경험한 군대와 라면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1980년대 이야기로 시작한다.


1)훈련소의 라면

일요일 아침. 라면이 나왔다. 녹색 식판 한쪽에 라면이 두 개 들어있고, 오른쪽에는 라면 국물이 들어있다. 라면은 쪄서 나오고, 국물은 스프를 넣고 라면과 무관하게 따로 끓인 것이다. 보다보다 이런 라면은 정말 처음 보았다.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먹는 법. 왼쪽의 라면을 오른쪽의 국물에 넣어서 먹는 것이다. 배가 안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라면을 반 개 정도밖에 못 먹었다. 라면에 대한 불만이 셀 수 없이 쏟아졌다.

1주일 후. 같은 형태의 라면. 한 개 반쯤 먹었다. 먹을 만 했다. 라면은 똑같은데, 나는 바뀌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간사한 놈들...

다시 1주일 후. 라면을 기다린다. 두 개를 다 먹었다. 2주 전 쏟아놓던 불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다음 마지막 일요일. 토요일부터 일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라면 때문이다. 국물도 다 먹는다. 충격적이다. 이 변화를 지켜 본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2)자대(*)에서 먹는 라면

(*자대 :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후 실제로 군 생활을 하게 되는 부대)

일요일 아침에 라면을 주는 것은 같다. 이 라면을 기다리는 것도 같다. 다만, 라면을 만드는 방법은 훈련소의 충격적인 방법과는 다르다. 커다란 통에 물을 끓인다. 라면을 넣는다. 스프도 넣는다. 끓인다. 끝. 그런데 여기서 참고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한꺼번에 끓이는 라면의 양이 100개가 훨씬 넘는다. 이렇게 끓이기 위해서는 전날 밤에 라면 봉지를 뜯어서 라면 박스 안에 라면을 모두 쏟아넣는다. 스프는 따로 뜯어서 커다란 그릇에 담아놓는다. 다음날 아침, 박스 안의 라면과 그릇에 담긴 스프를 커다란 알미늄 솥의 끓는 물에 한꺼번에 쏟아 넣는다. 그리고 끓인다. 배식을 하려고 국자로 뜨면 굵어진 국수발이 쉽게 끊어진다. 이 라면이 먹고 싶어서 평소에는 아침을 안 먹고 건너뛰던 고참이 배식 줄 맨 앞에 선다. 


3)라면을 많아지게 하는 마술

군대에서 한 병사에게 지급되는 라면의 정량은 두 개다. 라면 봉지 하나 안에 라면 두 개와 스프 두 개가 들어있다. 이렇게 생긴 라면을 처음 본 나는 그 신선한 발상에 많이 놀랐다.  내가 군대 라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나의 보직이 1종계(*)였기 때문이다.(*1종계 : 행정병 보직 가운데 하나. 주식과 부식을 관리하는 보직이다.)

그런데 라면을 배식하려다 보면 종종 라면이 정량보다 모자란다. 이유 설명은 생략한다. 이때 그 양을 맞추는 방법이 있다. 취사병에게 인원수는 얼마고, 라면 양은 얼마라고 하면 알아서 맞춰 끓인다. 노하우는 간단하다. 물을 더 넣는 것이다. 그리고 더 오래 끓이는 것이다. 그러면 라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팅팅 불어서 점점 더 많아진다. 하지만 맛없다는 병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1종계로서 약간의 가책을 느낀다. 잠시 후 생각을 고쳐먹는다. 부족한 라면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다.



4)컵라면과 보일러

취침 점호가 끝난 후 전 중대가 컵라면 회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요일 아침 불어터진 라면도 없어서 못 먹는 판이니, 자기 전에 먹는 컵라면이야 말해 무엇하랴. 문제는 수십 명이 먹을 컵라면 물을 어떻게 준비하느냐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는 최신형으로 된 막사였다. 난방 방법도 난로가 아니고 스팀(라디에이터)이었다. 컵라면 물의 답은 스팀에 있었다.

컵라면 물을 마련하기 위해 난방용 보일러를 가동하는 것이다. 충분히 난방이 되면 각 내무반별로 스팀을 열어서 주전자에 물을 받아 컵라면에 붓는다. 물이 펄펄 끓지 않으면 어떤가. 그래서 좀 설익으면 어떤가. 라면을 먹을 수 있는데. 보일러 물로 라면을 데워 먹는 게 찝찝하지 않느냐고. 무슨 소리. 라면을 먹을 수 있는데. 내가 군 복무할 때 라면은 그런 것이었다.


5)사꾸 라면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다. 이건 1종계와 취사병들만 알고 있는 비밀에 해당한다. 취사장에서 국을 떠서 배식하는 국자를 ‘사꾸’라고 한다(사꾸의 어원은 잘 모르겠다). 보통 국자보다는 훨씬 크다. 한 국자 가득 뜨면 1인분의 국 양보다 더 많다.

밥은 압력 밥솥에 하게 되는데 보통 오후 4시쯤이면 저녁밥이 다 된다. 밥이 다 되면, 압력 솥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밸브를 열어서 증기를 빼낸다. 이 증기는 엄청나게 뜨거워서 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종종 유용하기도 한 법. 앞에서 말한 사꾸에 라면을 반으로 꺾어서 담고(가득 찬다), 스프를 넣는다. 그리고 밥솥의 뜨거운 증기가 쏟아져 나오는 꼭지에 사꾸를 갖다 댄다. 쏟아지는 증기가 라면을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초다. 30초면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최상의 라면이다. 군대에 고춧가루는 늘 있으니 그것도 해결이다. 압력솥 물이 찝찝하지 않느냐고? 보일러물로 컵라면도 먹는데, 펄펄 끓인 증기야 당연히 땡큐다.


돼지고기를 안 먹는 나는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은 간혹 사꾸 라면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그러다보니 라면을 자주 먹었다. 그 바람에 제대하고 난 후 몇 년 동안은 아예 라면을 먹지 않았다. 다시 라면을 먹게 되고 나서도 컵라면은 먹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다른 세계 이야기같은 이 긴 글을 읽은 여성 독자는 곰신 카페에 이렇게 쓸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가 뭔지 알아요? 군대에서 라면 먹은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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