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20여회 쓰면서 아직 김치를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고려하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 늦기 전에 짧게라도 적어봐야겠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음식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김치다. 배추김치, 깍두기, 백김치, 동치미 등 모든 김치에 해당한다. 김치를 갓 담갔을 때는 풋내와 함께 설익은 맛이 난다. 한편 채소의 싱싱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배추김치든 오이김치든 김치로 불리는 음식들은 예외가 없다. 나의 아내는 이 맛에 김치를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김치는 점차 신맛을 더해간다. 풋풋한 느낌이 사라진 잘 숙성된 김치에서는 신 냄새와 신맛이 난다. 사용한 젓갈의 종류에 따라 맛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신 느낌은 동일하다. 잘 익은 배추김치의 몸통 부분을 씹었을 때 터져 나오는 시원한 맛은 김치를 먹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잘 절여진 김치만이 이런 완성된 맛을 낼 수 있다. 이 맛은 김치를 담그는 첫 순서인 소금에 절이는 단계에서 이미 결정된다. 덜 절여진 김치는 나중에 이 완성된 맛을 내지 못한다. 소금에 절일 때 김치 어딘가에 뿌려진 맛의 씨앗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아내와 달리 이 신맛에 김치를 먹는다.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풋김치를 아예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상태의 김치를 먹지 못한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아내는 친정으로 김장 품앗이를 하러 갔다. 김장을 도와준 대가로 겨우내 김장김치를 얻어먹었다. 작은 원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이자였다. 그 바람에 우리 집에는 김치냉장고가 없었다. 과거형이 현재형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김치냉장고가 없다.
아내가 즐기는 김장김치의 하이라이트는 김장을 담근 날 ‘얻어 온’ 겉절이를 먹는 것이다. 이때 아내는 “어렸을 때 김장 날에 겉절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아팠다”라는 얘기를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또한 겉절이에서 건져먹는 굴 맛에 대한 예찬도 빼놓지 않는다. 이때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나는 김치는 발효식품이니 익은 후에 먹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원론적 반론을 제기한다.
장모님이 안 계신 지금 우리는 김치를 사 먹는다. 이때도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 나는 신맛이 들어서 포장 비닐이 팽팽해진 김치를 일부러 고른다. 그 김치는 값도 싸다. 아내는 그렇게 겉절이를 좋아하지만 나를 위해 양보한다. 좋은 사람이다.
사먹는 김치가 아쉬운 것은 그 김치가 그 김치라는 점이다. A사의 김치나 B사의 김치나 C사의 김치나 모두 한 가지 맛처럼 느껴진다. 눈 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구별하지 못할 것 같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느라 평균적인 맛을 지향하는 음식 회사들에게 독특한 맛을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잘 익은 단계를 넘어 지나치게 익은 김치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시어 꼬부라졌다.’ 시어 꼬부라진 김치는 원래의 김치와 다른 김치 같다. 신 것이 지나쳐서 하얗게 ‘백태’가 생길 정도가 되면 먹기 어렵지만 그 전 단계까지는 얼마든지 김치의 신맛, 즉 김치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이 신 김치가 발효 식품의 본질을 잘 표현하는 ‘진짜 김치’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 김치찌개는 신 김치로 한다. 김치전도 신 김치로 한다. 풋김치로 만든 김치전을 본 적 있는가.
시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음식이 원래의 맛보다 못해지거나 아예 먹을 수 없게 되지만, 김치는 정반대다. 신 김치에, 갓 담근 김치에는 없는 완성된 맛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김치의 신맛은 완성되지 않는다. 시간이 만드는 맛을 즐기려면 기다림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