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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May 27. 2021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물김치 만들기

“... 음...”

걱정한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 다행이다. 이틀 전 담근 물김치의 맛을 본 소감이다. 며칠 더 기다리면 되겠다.


얼마 전 김치에 관한 글을 썼다. 쓰고 나니 내가 직접 김치를 담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추김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지만, 김치라고 부르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마음이 있으면 기회는 조금 쉽게 생기는 모양이다. 기회가 왔다. 그 출발점은 생뚱맞게도 배〔梨〕때문이었다. 


배는 얼마 전까지도 가을에 먹는 과일이었다. 초가을에 먹기 시작해서 초겨울이 되면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그러더니 요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일 년 사시절 배를 먹을 수 있다. 하긴 일년 내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어디 배뿐인가. 그래도 배는 가을 배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 배를 두 개 샀다. 한 개 5천원 가까운 값에 엄청난 크기의 배(이렇게 큰 배가 어떻게 나무에 달려있었던 거지). 배의 맛은 깎는 단계에서 이미 알 수 있다. 껍질이 깎여나가는 느낌이 배의 당도와 수분 함유, 씹는 느낌을 알려준다. 첫 번째 배. 깎을 때 이미 알았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는 우등생 같은 느낌. 당신은 부모님께 어떤 배였나요? 하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두 번째 배는 첫 번째 배와 완전히 달랐다. ‘우등생 아닌, 우등생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도 나름 존재 의의가 있다.’ 우등생 아닌 이 배의 존재 의의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했다. 물김치나 동치미에서 맛본 기억이 있는 배를 떠올렸다. 안 하던 짓을 해보기로 했다. 


맛없는 배를 살리기 위해 물김치를 담가보기로 한 것이다. 레시피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지 않았다. 아내에게 묻지도 않았다. 내 식대로 하기로 했다. 냉장고 안팎에 있는 재료를 떠올렸다. 무, 소금, 파, 마늘, 풋고추, 당근, 빨간 파프리카 등등.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료가 좋아야 음식이 맛있다. 그 점에서 이번 물김치는 아쉬움이 있다. (*사진 속의 무와 이번에 사용한 바람든 무는 아무 상관 없다. 사진속 무들아 미안~)


새로 산 무를 잘라보니, 속에 바람이 들어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었다. 하필 이 중요한 때에 바람 든 무라니. 잘라내고 썰려니 어려움이 크다. 아무튼 납작하게 썰어 굵은 소금에 버무려서 30분 정도 절였다. 그 사이에 풋고추도 썰고, 파프리카도 썰었다. 파프리카는 모양새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몰라 그냥 되는 대로 썰었다. 


이번 물김치의 핵심인 남겨놓았던 배 반 개를 꺼내 깎았다. 서걱서걱. 깎을 때 모래를 밟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속을 크게 파내버리고 부채꼴로 썰었다. 납작한 무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당근을 얇게 썬 후, 모양을 냈다(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하). 통마늘이 없어서 다진 마늘을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마늘을 넣지 않기로 했다. 


절여놓았던 무를 물에 헹궜다. 무를 통에 넣고 생수를 부었다. 나머지 재료들도 모두 쏟아 넣었다. 가는 소금을 넣고, 휘휘 저었다. 이게 끝인가? 이렇게 해서 김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먹거리가 만들어진다면, 왜 ‘새댁’들은 김치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인가. 무언가 빠졌나? 


맛이 들도록 하기 위해 물김치를 냉장고에 넣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지난번에 쓴 글의 핵심을 떠올렸다. ‘김치의 맛은 시간이 만드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이틀이 지났다. 


밖에 놓아둔 ‘나의 물김치’를 먹어보았다. 간도 제대로 안 보고 숙성했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다행히 조금 싱거운 느낌 외에 별 문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풋 냄새가 남아있는 듯해서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고 느꼈다. 배를 하나 건져 먹어보았다. 디저트로 먹을 때는 부족함이 많았으나, 여기서는 괜찮다. 음, 적재적소. 이제 냉장고에 넣어야겠다. 시원해지면 맛이 훨씬 살아날 거다.


다시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래. 시간이 만드는 맛, 물김치. 조금만 더 기다리자.


신데렐로가 처음 만든 물김치. 생각밖에 색감이 요란하다. 맛은 요란하지 않고 담백했다.

■후일담 : 물김치 맛보기

이틀 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김치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파프리카 때문인지 붉은 기운이 살짝 감돈다. 파프리카가 없었으면 전체적으로 색이 심심할 뻔했다. 풋고추 향이 약하게 살아있다. 하지만 매운 맛은 약하다. 다음에는 청양고추를 넣어봐야겠다. 빨간 파프리카도 빨간 고추로 바꿔봐야겠다. 숟가락을 들었다.

“아.” 

이런 맛이구나. 투명하던 국물이 조금 탁해졌다. 국물에서 은은한 단맛이 느껴진다. 배 때문이다. 설탕같은 재료와는 태생이 다른 자연의 단맛. 그리고 풋 냄새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 시간이 들어섰다. 처음 해 본 물김치지만 나름 완성된 맛이 느껴진다. 시간이 만들어낸 조화일 것이다.


끄트머리에 와서야 주인공이 생각났다. 물김치의 주인공 무를 잊고 있었구나. 부채꼴 배와 구분되는 네모난 무의 맛. 가볍게 씹히는 느낌이 깍두기와도 다르다. 파프리카와 풋고추 사이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무의 흰색이 왠지 겸손해 보인다. 다음엔 좀 더 잘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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