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울 때가 되었다. 어제 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여름이다. 여름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태양의 계절, 휴가의 계절, 콩국수의 계절 등등.
나는 이렇게 표현한다.
여름은 수박의 계절이다.
여름을 굳이 수박의 계절로 표현하는 것은 물론 수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수박을 먹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다녀온 후부터다. 그 전에도 먹기는 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씨를 뱉는 것이 귀찮아서 일부러 찾아 먹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포도도 먹지 않았다. 나름 귀차니즘의 원조격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바뀌었다. 군대에서는 아무래도 과일(수박은 과일은 아니다. 야채다)을 먹을 기회가 적다. 씨를 발라야 하는 귀찮음도 무릅썼다. 그러다 좋아졌다. 이렇게 쓰자니, 처음에 티격태격하다 연인이 돼 가는 로맨스 영화 같다. 하지만 포도와는 끝내 좋은 관계가 되지 않았다.
한번 좋아지고 나서 그 ‘호(好)’가 자리잡았다. 요새 방송에는 왜 그리 ‘호불호(好不好)’가 많은지 모르겠다. 한자가 쉬워서 그런가?
수박이 좋은 이유
잘 익은 수박에 칼이 들어간다. 손목을 한두번 움직인다. 그때 쩍~ 소리와 함께 수박이 갈라지면서 빨간 속살이 드러난다. 내가 자른 것이 수박인가, 한여름 폭염인가. 더울 때 이만큼 시원한 먹거리는 없다. 먹기 좋게 잘라 냉장고에서 차게 한 수박은 여름 간식의 제왕이다(나의 개인적 취향이다). 아이스크림이나 빙수가 더 달고 더 시원한 듯하지만 이런 간식류는 먹고 나면 물이 당긴다. 하지만 수박은 따로 물을 먹을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완성이다.
12 브릭스 수박을 먹기 쉽게 잘랐다. 색깔이 빨갛게 보이질 않아 아쉽지만, 단맛은 아주 강하다.
참외, 자두 등은 단맛에서 수박을 앞서지 못 한다. 양적인 면에서도 황제다. 먹고 싶은 만큼 즐길 수 있다. 한번에 자두 10개, 참외 5개를 먹는 대과일가라 해도, 7~8kg짜리 수박 한 통을 먹지는 못 한다. 단맛에서 경쟁할 여름 과일로 복숭아가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수박이 먼저 군림한 후 복숭아가 나선다. 복숭아는 수박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포도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논의에서 배제했다.
마트에서 수박을 고르는 방법
문제는 맛있는 수박을 어떻게 고르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 라떼 시절의 기준이 몇 가지 있었다.
검은 줄이 선명한 것이 좋다.
꼭지가 말라비틀어지면 안 된다.
검은 줄의 수는 몇 개 이상이 되면 좋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이것들은 모두 신뢰도가 높지 않은 포춘 텔러(Fortune-Teller)의 주문 비슷한 소리였다.
라떼 들이 기억하는 단 수박을 고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
식칼로 수박 상단 1/3 지점을 삼각형으로 자른 후, 그 삼각형을 식칼 끝으로 푹 찔러 꺼내서 확인 차 먹어보는 것이다. 요즘 마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이 브런치 매거진 앞의 글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기준'에서 제시한 방법이 있다. 브릭스(Brix)와 ‘돈맛’으로 고르는 것이다.
위 가격표는 11 브릭스, 아래 가격표는 12 브릭스에 해당한다. 7kg으로 같은 크기의 수박이 1 브릭스 차이에 따라 무려 7천원이나 차이가 난다.
브릭스는 돈과 연동하기 때문에 브릭스나 돈 중에 어떤 기준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내가 생각하는 브릭스의 기본값은 11이고, 프리미엄에 해당하는 브릭스는 12 이상이다. 11 브릭스면 과거에 식칼로 맛을 보던 수박 가운데 당당히 합격점에 들었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품종개량으로 단맛이 강해지고, 그 바람에 소비자들의 역치점이 높아져서 12 브릭스 이상을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은 브릭스 표시가 분명해서 선택이 쉽다. 수박 하나하나에다 스티커를 붙여 놓기도 한다. 백수 수준에서 과다 출혈의 위험을 무릅쓰고 12 브릭스 수박을 골랐다. 올 여름들어 두 번 다 성공했다. 그렇다. 이런 표현을 쓰자니 속(俗)스러움 지수 15는 되는 듯하지만, 브릭스가 높아지면 실패 확률은 낮아진다.
끝으로 피해야 할 점 한 가지.
장마철에는 수박 먹기를 잠시 쉬었다가 장마 끝난 후 먹는 것이 좋다. 장맛비는 수박의 단맛과는 상극이다. 비가 수박의 단맛을 모두 씻어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