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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Jul 26. 2021

여름, 더위, 그리고 에어컨

열일하는 에어컨에게 보내는 감사

어젯밤에는 세 번쯤 깼다. 더위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비몽사몽이라 정확히 몇 번 깼는지 잘 모르겠다. 깰 때마다 안방 에어컨을 틀었다. 에어컨 소리 때문에 틀 때마다 다른 집이 신경쓰였다.


거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채 자면 안방까지 시원해 질 텐데 에어컨 소리 때문에 마음놓고 그리 하지 못한다. 아내에게 “요즘 같은 더위에는 그런 거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해놓고는 정작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걱정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에어컨이 서 버릴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집 에어컨의 ‘컨령(齡)’은 14세다. 2007년 여름 한창 잘 나가던 김연아 선수가 CF 모델을 하던 모델을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첨단이던 1+1모델이다. 거실에 스탠드형 에어컨 하나, 방에는 조그만 벽 부착형 하나. 15년 가까이 잘 써먹었다. 


에어컨 나이가 10년이 훌쩍 넘으면서 2~3년 전부터는 한여름에 걱정이 생겼다. 에어컨이 서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다. 새 에어컨 비용도 부담이지만, 에어컨 구입과 설치에 시간이 꽤 걸린다는 뉴스 때문이다. 다행히 올해는 에어컨 관련한 설치 지연 뉴스는 없다. 코로나 뉴스에 밀려서 그런가.


조금 전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왔다. 코로나 시국에 밖에서 밥 먹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나와 아내에겐 명분이 있다. 에어컨을 쉬게 해 줘야 한다는 명분.


일요일 점심, 카페에서 늦은 브런치를 먹으며 이 카페 에어컨이 잘 나온다고 키득거렸다. 덕분에 휴식을 얻은 우리집 에어컨도 좋아할 거라며 웃음을 보탰다. 내가 브런치(앞 문장의 브런치와는 다른 여기 브런치)에 에어컨 이야기를 해야겠다니까 아내가 말린다. 에어컨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텐데 하며 걱정을 한다. 나는 요즘 웬만하면 다 에어컨 있다면서 일축했다. 말해놓고도 ‘웬만하면’의 경제적 범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스스로 궁금했다. 


아내의 걱정을 사회적 걱정이라 한다면 내 걱정은 개인적 걱정이다. 여름이라 날씨가 덥고, 그러다보니 에어컨을 틀고, 노후한 에어컨이 멈출까봐 걱정하는 게 ‘무슨 이야깃거리가 될까’ 하는 걱정.


공감은 이야깃거리의 원천이다. 나는 우리 집처럼 노후 한 에어컨이 덜컥 서 버릴까봐 걱정하는 집도 꽤 되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면서 에어컨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홍콩 시가지(사진 출처 : pixabay)

1998년 한여름 휴가차 홍콩에 여행을 갔다. 여름 한복판에 그 더운 홍콩에 가는 것도 휴가냐고 할지 모르지만, 요즘과 달리 아무 때나 휴가 내기는 어려울 때였다. 거기에 보탠 이유 하나 더. 그 전 해에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됐다. 혼돈의 시기를 보낼 듯한 홍콩이 궁금했다. 


홍콩의 더위는 대단했다. 하지만 한여름 서울에서 훈련한 ‘더위 선수’에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더위도 습한 것도 견딜 만했다. 구룡반도 번화가를 구경하는데, 먼저 노점상이 파는 길거리 과일 주스가 눈길을 끌었다. 청결 상태가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마시고 싶은 걸 참았다. 


그 걱정을 뒤로 하고 상가 거리에 접어들었는데, 어라. 찬 바람이 솨악 나오면서 더위를 그냥 날려버린다, 뭔가 했더니 상가 점포 안에서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다음 점포도 그 다음 점포도 다 문을 열어놓고 에어컨 바람을 밖으로 뿜어내고 있다. 상가가 연이어 있는 길을 걸으면서는 더위를 느끼지 않는다. 문화 충격이다. 반환된 홍콩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은데, 내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한여름에는 은행에 에어컨 바람을 쐬러 가던 시절이었다. 요즘 젊은 층에서는 그런 때도 있었느냐 할지 모르지만 한동안 그랬다. 그래서 은행에서 너무 오래 죽치지 말라는 안내 같은 것도 하고 그랬다. 


나의 홍콩 여행 시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상가 문을 열어놓고 에어컨을 틀지 말라는 캠페인도 벌였다. 에너지 절약 차원이었다. 캠페인 성격을 넘어 ‘단속’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실제로 단속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문화에서 살다가 모든 가게가 문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문화로 들어갔으니 이게 뭔가 싶은 것도 당연했다.


엊그제 우리 집 에어컨과 관련해서 새로 안 사실이 있다. 에어컨 실외기가 가동될 때는 그 사인이 그림으로 뜬다는 것이다. 아내가 에어컨을 틀면서 실외기가 안 돌아간다고 걱정하며 나에게 설명해 준 내용이다. 아내의 걱정에 동참하며 왜 그 사인이 안 나오나 하고 지켜보는데,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만 사인이 뜬다. 처음 보았다. 이걸 무지하다고 해야 하는지 무심하다고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C 자 아래 박스 안의 바람개비가 돌아가면, 실외기가 가동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에어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 더. 이제는 아주 유명해진 일화다.

싱가폴의 이광요 전 수상의 말이다. “나에게 인간이 만든 발명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에어컨을 꼽겠다.” 더운 나라의 정치인다운 말이고, 점차 아열대화한다는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책상 컴퓨터에서 거실 창가쪽 에어컨을 쳐다보니 날개가 열린 채 잘 돌아간다. 여기선 실외기 사인이 안 보이지만 소리를 들으니 실외기가 잘 가동되는 모양이다. 에어컨 바로 앞에  몇 년 째 폐기 경계선상에 있는 선풍기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 회전 버튼이 고장 난 선풍기가 에어컨만 신경쓰지 말고 나도 신경쓰라는 것 같다. 교체 대상 번호표라도 나눠줘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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