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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05. 2021

정전-강 건너 불, 발등의 불

전기는 공기와 매한가지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렇다. 아직도 세계 각지에는 전기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경험해보면 그렇게 느끼게 된다. 정작 소중한 것,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없어져야 비로소 그 존재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더위가 절정을 향해 치달으면서 아파트 단지가 정전되었다는 뉴스를 몇 차례 보았다. 한 두 시간이 아니라, 반나절 이상 전기가 안 들어온 모양이다. 그곳 주민들은 너무나도 불편하고 다급했겠지만, 뉴스로 접하는 그들의 불편함은 나에게는 강 건너 불과 비슷했다. 그런데 오늘 내 발등에 그 불이 떨어졌다. 작은 불똥이지만 뜨거웠다. 얼마 전 정전 지역의 불편을 공감하지 못했던 게 뒤늦게 미안했다.


오늘, 내가 사는 아파트가 오전 세 시간 동안 정전(停電)이 되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정전과 예고된 정전은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며칠 전 아파트 전체적으로 정전된다는 안내가 게시판에 붙었다. 안내 방송을 통해 누차 고지되기도 했다. 혹시라도 불만이 쏟아질까봐 관리사무실에서 신경을 쓴 모양이다. “전기실 변압기 절연류 및 ATS 교체 공사로 부득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냥 정전이 되니 미리 대비하라는 말로 이해했다.


어렸을 때는 예고 없이 정전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기 공급의 안정성이 떨어져서 생기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는 양초가 상비품이었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그럴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정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 후에도 몇 차례 정전 경험을 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가 노후해서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씩 전기가 나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잠깐 정전이 되었다가 ‘어떡하지’ 어쩌고 하다보면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는 했다. 지금 우리 집에는 양초가 없다.

정전이 된다니까 모든 게 걱정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두드러지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냉장고다. 냉동실과 냉장실을 열어보았다. 세 시간이라니까 별 일 없겠지 하면서도 걱정이 컸다. 며칠 전 장본 것도 생각이 났다. ‘내일 장보러 갈 걸 괜히 미리 장을 봤다.’ 하지만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다음으로 불편한 건 엘리베이터다. 9층은 걸어서 오르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높이다. 그 다음은 냉방이다. 요즘 같은 때 에어컨도 틀 수 없고, 선풍기도 틀 수 없다면 몹시 곤혹스럽다. 또 다른 한 가지는 TV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요즘은 TV의 대체품이 많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게다가 오늘은 아침 9시부터 올림픽 여자배구 중계를 하는 날 아닌가. 참, 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전기와 수도가 어떻게 연동하는지 알 길이 없으나, 설상가상이다.


아내와 나는 ‘피난(避難)’ 계획을 세웠다. 피난을 피서계획 세우듯 하니, 철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 피난이래봤자 별 거 아니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핑계 김에 아침도 안 차려 먹고 나왔다.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때 생전 눈여겨보지 않던 카페 천장의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까지 몰랐는데, 그곳에 전등이 가득 있었다.


정전 덕분에 색다른 체험 한 가지를 더 했다. 아침 식사 후 고속터미널 상가에서 생활용품 몇 가지를 살 생각이었다. 카페에서 자리를 뜰 때 우리나라 여자배구 팀이 한창 경기 중이었다. 세트 스코어로 1대1 상황에서 3세트가 진행 중이었다. 서로 한 점씩을 주고받는 초박빙의 승부. 계속 지켜볼까도 했으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 포기했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지하도 안. 이유는 모르겠는데 지하도 곳곳 벽 기둥에 TV가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5세트 10:10 동점 상황. 끝나려면 조금 더 걸릴 듯해서 그냥 걸었다. 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11:10이구나. 계속 걸었다. 잠시 후 다시 환성. 12:10이구나.


그 다음 TV 앞에서 멈춰 섰다. 상가 종사자들과 행인 10여명이 TV를 보며 열심히 응원 중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도 김연경과 배구 룰을 잘 꿰고 있었다. 결과는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승리. 응원하는 규모는 작지만, 느낌은 20년 전 월드컵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회에는 성경, 불교에는 불경, 배구에는 연경이라는 ‘김연경 유머’(김연경 자작설이 있는데, 실제는 누가 만든 것인지 잘 모르겠다)를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가동되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전등을 켜보았다. 전기가 들어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손을 넣어보고 얼굴을 들이밀어보았다. 아주 차가웠다. 얼음도 녹지 않았고, 걱정과 달리 아무 일도 없었다. TV를 켰다. 김연경 선수가 다시 TV에 나오고 있다. 


부재(不在)를 통해 그 존재가 증명된 전기. 다행히 예정대로 발등의 불은 꺼졌고, 꺼졌던 우리집 전등은 켜졌다. 불이 꺼져서 다행인지, 켜져서 다행인지 아무튼 다행이었다. 일상은 늘 그렇듯 별 느낌이 없고 평온하다.



저의 두 번째 책이 막 출간되었습니다.

*이하 신데렐로의 새 책 <남편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 홍보입니다*


◀책소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설거지로 주방에 입문한 은퇴자들에게 칼질할 용기를 주는 책!


베이비붐 세대인 저자가 주방이라는 신세계와 직접 부딪치며 기록한, 서툰 은퇴 남편의 주방 적응기. ‘은퇴’라는 처음 접하는 시간과 ‘부엌’이라는 낯선 공간의 이중고를 겪는 이들에게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책이다. 


주방 관련 소재를 망라하여 주방이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인생 2막이 흥미롭다. 진지하고 유쾌한 필치로 전하는 이야기는 주방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성찰하게 한다. 칼질 잘하는 노하우라든가 화려한 레시피가 나오진 않지만, 주방 입문자의 현실적인 고민과 궁금증을 풀어감으로써 칼질할 ‘용기’를 주는 책. 은퇴 남성들뿐만 아니라 주방에 입문한 싱글족, 독거 중년 등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주방은 나의 것>, <감자야 미안해>, <만두는 추억을 싣고> 등 3개의 장에는 각각 음식과 생활, 음식 만들기, 음식과 추억에 관한 42편의 글이 담겨 있으며 중간중간에 따뜻한 손그림도 곁들여져 있다. 은퇴 후 ‘삼식이(집에서 하루 세 끼 챙겨먹는 백수)’가 될 것인가, ‘세상에 하나뿐인 그대’가 될 것인가. 선택은 이 책을 읽고 나서 하시길.


◀책 내용 자세히 보기▶

 https://blog.naver.com/orgelbooks/22245268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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