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태전을 부치고 깨달은 사실들
어느 한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을 일러 고수(高手) 혹은 상수(上手)라 한다. 반대로 별 볼일 없는 능력의 소유자는 하수(下手)라 하고, 그 중간의 어정쩡한 실력자는 중수(中手*)라 한다. 이 말의 출처는 아마도 바둑일 것이다.
바둑의 상수들은 돌을 바둑판 위에 놓기 전에 몇 수 앞을 내다본다. 중수는 확신을 가지지 못 한 채로 돌을 놓고, 그 후에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둔 수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하수는? 확신 없이 돌을 놓는 것은 물론이고, 판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놓은 돌이 악수인지 좋은 수인지도 잘 모른다.
조훈현 9단 같은 천하의 최고수는 무려 60수 앞을 내다보았다고 한다. 바둑이라는 게임이 대략 220~230수 정도에 끝이 나니까, 60수 앞을 내다본다면 바둑의 중반에 이미 승패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긴 그쯤 돼야 자신을 이기겠다고 덤벼드는 중원의 ‘칼잡이’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겠지.
명절 뒤 끝에 바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긴 명절이었다. 연휴가 5일이나 이어졌다. 이 긴 휴일이 즐겁고 재미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괴롭고 힘든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명절이 힘든 이유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먹을거리와 관계된 문제였을 것이다. 제사 음식 준비도 그렇고, 명절 음식을 마련하는 것도 그렇다. 명절의 의미가 예전보다는 많이 퇴색했지만 여전히 명절에는 무언가 명절 음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먹어줘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음식을 직접 만든 후부터 명절에는 설, 추석 가리지 않고 만두를 빚었다. 늘 이유가 많은 막내 동생을 구슬려서 함께 만두를 빚었다. 내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만두를 빚을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막내 동생이 오지 못 한다고 해서 만두를 빚지 않기로 했다. 함께 하는 재미가 없으니 만두 만들기가 시들했다. 그대신 새로운 도전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태전을 만들기로 했다. 전 감으로 돼 있는 동태를 샀다. 양이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 생선전을 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조금 부담이 되기는 했다. 추석 전날인 월요일 오후를 디데이로 잡았다.
아내에게 묻지 않고 인터넷을 뒤져 조리법을 찾았다. 그런데 첫 번째 순서부터 뭔가 조금 걸린다. 그 조리법에서는 소금물에 동태포를 5분 쯤 담갔다 조리하면, 살도 흐트러지지 않고 간도 배게 된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물었더니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단다. 고민 끝에 인터넷을 선택했다. 소금물 농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대충 준비했다. 해동을 하긴 했지만, 그 동태포를 하나하나 떼어서 소금물에 넣는 행위부터 쉽지 않다.
그 다음 순서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동태포에 밀가루 옷을 입히고, 그것들을 달걀에 담갔다 꺼내서 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부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그 조리법 안에 오만가지 지뢰와 위험물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하긴 소세지에 달걀을 입혀 부쳐본 경험이 거의 전부인 내가 생선전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어찌 다 알 수 있었겠는가.
밀가루옷을 입히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밀가루가 너무 많이 묻거나, 잘 안 묻거나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리 공간이 날리는 밀가루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 다음 단계인 달걀옷 입히기도 어려웠다. 밀가루옷을 입은 동태포를 풀어놓은 달걀에 넣으면 달걀이 덩어리로 묻었다가 뚝 떨어져버리는 둥 달걀과 동태가 따로 놀기 일쑤였다. 라텍스 장갑을 껴서 조금 편한 것 같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영겨붙는 문제는 해결 난망이다. 손가락에 밀가루와 달걀이 엉겨붙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된다.
마지막 단계인 부치기. 예전에 어머니를 도와서 전을 부칠 때를 떠올렸지만, 현실은 그때보다 훨씬 가혹했다. 약한 불에 부쳐야 한다는 정도는 알지만, 그렇게 하자니 두꺼운 부분이 제대로 익는지 걱정이 됐다. 그나마 몇 년 동안 음식을 만든 경험이 있는지라 홀랑 태워먹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동태전을 만들었다. 중간에 아내가 가세해서 부쳐낸 전을 다른 프라이팬에 옮겨서 식히고 기름도 빼라는 조언을 해주고, 난장판인 조리대를 정리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동태전을 만들면서 아내와 나는 ‘종갓집 며느리는 참 힘들었겠다’는 경험해보지 않는 상상속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아랫 동서가 생겨서 도움을 좀 받겠다 싶었는데, 그 동서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부쳐 놓은 전만 낼름 집어먹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는 키득거리기도 했다.
남들이 다 하는 명절 전 부치기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다량 혹은 대량으로 전을 부쳐 본 적 없는 나에게는 대단한 일이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음식 만드는 능력을 평가하는 계기도 되었다. 하수는 아니지만, 기껏 잘 봐줘야 중수 중의 아랫 급에 속하는 수준 정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전을 사서 먹을 줄만 알았지, 그걸 만드는 사람의 고충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 샀으니까 떳떳하게 먹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드는 사람의 노고는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을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노고도 몰랐고, 결혼 후 한동안 전을 부쳤던 아내의 어려움도 몰랐다. 생선전 한 가지 만들기가 이러니, 제사 음식과 명절 음식을 모두준비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힘이 들어야 할까.
전을 많이 부쳐놓으니까 좋은 점이 있다.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두꺼워서 안 익을까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먹을 만 했다. 두 번을 먹었는데 아직 많이 남았다. 두 번쯤은 더 먹을 수 있을 듯하다.
한 가지 고민이라면, 다음에 생선전 부치기를 계속할지 말지 하는 점이다. 단 한번 명절 전 부치기를 해놓고는 그게 힘들어서 안 할 궁리를 하니 팔자 편하다는 소리를 피하기 어렵겠다. 이러다가 된장 고추장 담그는 법을 아는 주부가 점점 줄어드는 판에, 전 부치는 방법을 아는 주부도 자꾸 줄어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힘들게 명절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주부(부엌에서 일한 남성들도 포함해서)들에게 내 나름의 경의를 표한다. 고생 많으셨고, 다음 명절은 좀 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중수 :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돼 있지는 않고, 오픈 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의미가 통하는 데 지장이 없어서 그냥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