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 오래도 했다

울지 못한 세월의 노래 _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

by 유투리

그의 어깨가 말을 걸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거의 2년 만에 복직했다.

낯선 듯 익숙한 사무실 풍경 속에서

몇 년 전만 해도 젊고 에너지가 넘치던 남자 임원의

희끗해진 머리칼과, 어쩐지 작아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소

사회적 지위, 가장으로서의 책임,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조금씩 조용하게 만든 건 아닐까.

목소리보다 어깨가 먼저 말을 거는 나이.

그런 시간이 그에게도, 우리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자식으로서 밝고 유쾌하고, 든든한 모습의 아버지만 기억해왔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뒤에 감춰진 고독과 책임감이 얼마나 컸을지 비로소 조금씩 짐작하게 됐다. 트로트의 힘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 곁의 누군가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


스크린샷 2025-05-14 233204.png 출처: 조항조 - 남자라는 이유로 [가요무대/Music Stage] | KBS 210426 방송

우리 곁의, 남자 노래

조항조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조용하고 깊다.

〈남자라는 이유로〉는 많은 사람들이 ‘조항조의 원곡’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 곡은 원래 최진희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다. 몇 년 뒤 박우철이 리메이크했고, 조항조는 1997년, 이 노래를 다시 불러 거의 30년 가까운 무명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조항조는 이 노래를 ‘살아내야만 했던 세대의 남자들’처럼 담담하게, 그러나 깊게 불렀다.

발표 당시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었다. 가사 속에 담긴 남자의 고독, 책임, 참아야 했던 시간들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 노래로 그는 트로트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드라마 OST <사랑찾아 인생찾아>, <사랑꽃> 등을 통해 중장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말하듯 부르는 사람, 사람을 안는 노래

그는 ‘트로트 발라더’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다.

박진영이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말하듯, 조항조는 진심을 담아 ‘말하듯 부르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공기 반, 소리 반의 미묘한 울림, 힘을 뺀 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창법이 그를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스크린샷 2025-05-14 233453.png 출처: 이찬원 - 남자라는 이유로 [열린 음악회/Open Concert] | KBS 220123 방송

이찬원, 장민호, 안성훈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그를 롤모델로 삼고 <남자라는 이유로>를 커버한다.

기교보다는 진심, 기술보다는 이야기로 승부해 왔다.

조항조는 트로트계의 4대천황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세월이 그의 창법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

후배들과의 듀엣에서도 참 잘 어울린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품어주는 목소리.

그는 노래로도 사람을 안을 줄 아는 가수다.

최근 이미자는 ‘맥을 이음’ 무대에 함께할 후배로 조항조와 주현미를 선택했다.

그 이름을 나란히 올린 것만으로도 조항조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보여준다.

이미자처럼 조항조도 담담한 목소리로 마음을 울리는 가수다.

화려한 기교보다 오래 남는 울림.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목소리.

그는 여전히 조용히, 그러나 깊게 성장하고 있다.


저마다 처음인듯 사랑을 하면서도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앞에선 미소를 짓네요

2절의 첫 부분 가사처럼, 결국 남자를 버티게 한 건 사랑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그 시절의 아버지,

이제라도 맘껏 표현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지금도 괜찮은 척 살아가는 누군가가 보인다면,

그 사람에게 오늘만큼은 조금 더 따뜻해도 좋겠다.

조항조의 이 노래는, 그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포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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