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니' 보고 생각나서 푸는 첫사랑 썰
주말 오후에는 집에서 예능 프로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생각 없이 틀어놓은 티브이에서는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저번주 방송을 본 이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이 날은 정말 간질간질하고 설레서 담요를 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한 의뢰인이 중학교 때 좋아했던 첫사랑 선배를 찾고자 방송국에 사연을 보냈고 그 주인공을 수소문해 옛날 추억의 카페에 둘이 재회하는 영화 같은 내용이다.
문득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지나간 내 첫사랑이 생각났다. 사실 내 첫사랑은 방송에 나온 것처럼 연락이 끊긴 것도 아니고 근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인스타그램 팔로우며 심지어 연락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에는 아련함과 그리움이 눅진하다. 가끔 친구들끼리 첫사랑 얘기가 나오면 다들 처음 사귄 남자 친구나 가장 오래 만난 남자 친구를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여태 만났던 어떤 애인들도 첫사랑이 아니었다. 내 첫사랑은 안타깝게도 짝사랑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원래 남의 첫사랑 이야기 듣는 것만큼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일도 없으니 한번 털어보고자 한다. 이미 이 얘기는 내 주변 사람들이라면 외울 정도로 들었을 것이다. 술 먹고도 얘기하고, 여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얘기하고, 갑자기 그 애 이름이나 근황을 들으면 또 얘기했다. 그동안 매번 질색하지 않고 들어준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고마움을 전한다.
내 첫사랑은 18살 여름에 찾아왔다. 당시 고등학교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적당히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2학년이 되어 첫 후배를 받아 들떴던 한 학기가 지나고 친한 후배가 한 명 생겼다. 사실 내가 직접 친해진 후배는 아니고 친구가 알던 동생이어서 건너 건너 친해지게 되었다. 한 살 어린 그 친구는 처음 봤을 때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엑소의 백현이 이상형인 나는, 그를 정말 친한 동생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밤, 운동장으로 산책을 나간 나는 그 애가 학교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툭 치며 '뭐야~ 늦게까지 고생했네. 행사 준비할 거 많아?' 하고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애가 내 팔에 이마를 기대며 '아 누나, 나 너무 힘들어. 진짜'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살짝 손이 떨리고, 멍해졌다. 돌이켜봐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순간인데, 나는 그렇게 그 후배한테 반했다. 여지없이.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입덕 부정기를 겪으며 아무렇지 않게 굴려고 노력했지만, 장렬히 실패했다. 쿨하게 입덕을 받아들인 나는 간간히 하던 연락을 필사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카카오톡과 문자를 번갈아가며 노력했다. 그렇게 약 2달 간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그동안 나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용기와 패기는 내 인생에 다신 없을 것이다.
전교 부회장이던 친구에게 부탁해 선도 명단에 함께 넣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매점에 걔가 있다고 하면 우당탕 뛰어내려 갔다. 정말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티를 다 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순간들도 많았던 거 같다. 그렇게 죽자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표현했다. 오죽하면 옆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년까지도 소문이 났다. 내가 그 앨 좋아 한다고. 그땐 부끄럽지도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렇게 행복했던 여름이 지나고 차디찬 현실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그 애가 돌연 연락을 끊어버린 것이다. 기숙사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데면데면하게 하고 일절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조급하고 불안해진 나는, 그 애의 최측근인 남사친을 탈탈 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멍했고, 다음에는 울컥했다. 그리고는 기숙사 내 방에 돌아와 짐을 쌌다. 하루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훌쩍일 것 같은데 룸메이트들이 가득한 기숙사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우울하게 외박 신청을 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친한 친구가 기숙사로 돌아오며 어디 가냐고 물었다. 그 순간 꾹꾹 참았던 감정들이 쏟아졌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친구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며,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며 안아주었다. 누군가 위로해주면 어린아이처럼 더 서러워지듯이 나는 그 친구에게 안겨, '걔가 나 안 좋아한대. 이제 연락도 안 할 거래. 하지 말래.'라며 울었다. 친구는 안쓰러워하며 나를 위로했고, 대강 울음이 그친 나는 고맙다고 인사한 후 집으로 향했다. 그 날이 내 첫사랑의 마지막 날이다.
사실 같은 학교에 기숙사다 보니 자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았고, 학생회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함께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 그런 척, 다 잊은 척하면서 그 애를 눈에 담고 동선을 쫒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그 애는 여자 친구가 생겼다가 없었다가 했지만 난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없었다. 그 애는 알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 내 이상형은 연하가 된 것을 말이다.
오래전 일은 아니지만 이젠 이렇게 추억으로 상기시켜도 힘들지 않은 것을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한 것 같다. 그래도 첫사랑은 첫사랑, 한 번 떠오르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얼마 전에 전역한 것 같던데, 곧 생일인데 축하 메시지 한 번 보내볼까 하는 미련도 함께 피어오른다. 2020년 흑역사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 않다면 마음을 접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정말 왜 하필 '놀면 뭐하니'에 첫사랑 이야기가 나왔는지, 그 와중에 왜 또 너 생일인지.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연말,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