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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m Lee Oct 05. 2016

두부장수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땅거미가 질 때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두부장수가 왔다는 소리다.


    부지런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나는 종종 그 두부장수 아저씨를 떠올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두부와 콩나물 등을 싣고 트럭으로 동네를 돌던 아저씨는 고된 육체노동에도 얼굴이 밝은 사람이었다. 장사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지만 아저씨는 순박하고 착했다. 아침 일찍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그날 팔 거리를 꾸리고 남들은 다 퇴근할 시간까지도 아저씨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며 손에 든 작은 종을 흔들었다. 신기한 것은 야채장수들은 어느샌가부터 자신의 품목을 외치는 목소리를 녹음해 틀기 시작했지만 두부장수 아저씨는 매번 종을 흔들고 두부가 왔다고 직접 외쳤다. 동네까지 들어온 기업형 슈퍼들은 앞다투어 할인 쿠폰을 나눠주고 멤버십 제도를 도용했다. 아저씨는 그러한 판매 꼼수보다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좋은 물건을 떼어 오시고 그것이 우리네 밥상에 맛있게 오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셨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포인트도 쌓이지 않는 아저씨의 단골이 되길 택했다.  


    우리 골목으로 들어오는 일곱 시 즈음에도 아저씨는 어제 봤던 그 뽀얀 두부 같은 얼굴로 두부를 팔았다. 나는 가끔 엄마 심부름에 잔뜩 짜증이나 얼굴을 구겼거나 고된 하루를 보낸 뒤라 웃음기 싹 가신 얼굴이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한 나에게도 아저씨는 오늘 콩나물이 정말 좋다며 말을 걸고 내가 건네 드리는 두부값 몇 푼에 배로 고마워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남들이 다 아저씨의 트럭에서 저녁상에 오를 재료를 살 때에 아저씨는 무엇으로 저녁을 드셨을까. 그 조그마한 트럭에서 쪼그려 앉아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셨을까.


    내가 코흘리개 시절 두부 한 모는 오백 원이었는데 내가 훌쩍 커서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그 두부값은 천 원을 넘지 못했다. 아저씨의 트럭에서 많이 사면 한 번에 삼천 원까지 값을 치르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아저씨의 성실함에 걸맞은 가격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저씨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삶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한다. 나와 아저씨 사이는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내가 치른 그 적은 돈을 더해 아저씨가 한평생 두부 판 돈은 아저씨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었을까. 


    이제 나는 그 동네를 떠났고 아저씨의 종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저씨가 아직도 우리 동네에서 두부를 파시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 삶의 한 어귀에 있었던 사람들을 이렇게 문득 떠올렸을 때 그들이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어디선가 아저씨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은 마트에서 파는 사각 플라스틱 통에 든 두부가 아닌 아저씨가 갓 떼 오신 김이 모락모락 나던 약간 삐뚤한 네모 두부를 검은 봉지에 야무지게 담아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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