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을 수록 무서운 오컬트 영화
개봉: 2018. 6. 7.(미국)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토니콜렛(애니), 밀리샤피로(찰리), 알렉스울프(피터), 가브리엘번(스티브) 등
오컬트 영화의 맥을 잇는 영화가 나왔다는 호평을 듣고 꼭 보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결국 vod로 보게 됐다. 영화관에서 봤다면 훨씬 생생한 공포의 분위기를 느꼈을 텐데 대낮에 본 '유전'은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사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다만 기괴한 사건들과 어딘지 섬짓한 가족관계, 예상치 못한 결말 등 흥미진진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상징과 복선이 굉장히 많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 호기심이 자극되고 해설이 궁금해지는 영화.
애니가 만드는 미니어처 세상은 악마의 입장에서 보는 장난감처럼 무기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또는 애니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기위해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며 자기 생의 주도권의 역할을 한다. - 미니어처 집과 가족의 모습이 그대로 애니의 집으로 바뀌는 장면이 가족의 정해진 운명을 보여준다. 또, 애니가 딸 찰리의 죽음 후, 약해지고 주변에 휘둘리며 자기 통제력을 잃었을 때, 더 이상 보기 싫다며 미니어처를 부순다.
찰리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예정된 살인이다. - 고등학생 피터의 파티에 챙겨줘야 할 게 많은 여동생 찰리를 찰리가 싫다는데 굳이 데리고 가라는 애니의 행동은 비상식적이다. 싫다고 할 만 한데 피터는 군말없이 데려간다. 이 또한 이상하다. 이 가족은 엘렌의 가족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혈연관계로 인해 악마의 수행자라는 운명을 지녔다. 애니와 피터는 무의식적으로 찰리를 죽이는 의식을 행했다. 초콜렛을 좋아하는 찰리한테 초콜렛케잌을 권하는 피터. 땅콩이 들어있었는지 (영화 초반에 찰리는 땅콩 알러지가 있음을 보여줬다) 숨을 못쉬고 목이 부어 피터를 찾자 피터가 놀라 차에 태우고 병원에 가는 도중, 찰리는 숨이 막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필 이 때 쓰러져있는 사슴을 피하려다 찰리는 전봇대에 부딪쳐 목이 잘린다. 전봇대에는 파이몬대왕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찰리는 엘렌이 가장 아끼던 손녀로, 파이몬대왕의 숙주 역할을 하였으나 파이몬은 남성의 몸을 원하기 때문에 피터로 옮겨가기 위해 찰리는 죽어야 했다.
애니가 몽유병이 있을 때마다 자식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한 이유는 자식들이 파이몬의 숙주가 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 본인이 악마의 수행자이기도 한 애니는 피터를 유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즉, 아들방에 불을 지르려고 하거나 개미에게 먹히는 악몽을 꾸고 찰리를 찾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제정신으로 악마의 숙주가 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행동이다.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어떻게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애니가 사실은 진짜고 갑자기 차분해져서 찰리를 부르는 의식을 행하자고 남편과 아들을 설득하거나 할 때가 악마의 수행자로서의 애니이다.
머리가 잘려야 파이몬이 해당 숙주로부터 다른 숙주로 이동할 수 있다. - 스티브는 엘렌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중에 엘렌의 시체는 머리가 잘려진 체 다락방에 있었다. 조안을 비롯한 파이몬숭배자들이 엘렌의 시체의 머리를 잘라 엘렌한테 있던 파이몬대왕이 찰리에게 가도록 했다. 애니가 엘렌의 생전 앨범을 살펴볼 때 파이몬대왕의 왕관을 쓴 엘렌이 왕처럼 앉아있는 사진이 있었다. 엘렌이 파이몬의 숙주였으나 죽었으니 찰리로 옮기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의식을 했다. (찰리가 학교에서 빛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앨렌의 환상을 보는데 이때 찰리에게 숙주를 보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찰리도 머리가 잘려서 죽은 이유이다. 그리고 찰리의 공책을 태우며 파이몬은 애니에게 들어가고 애니도 다락방에서 피터가 보고 있을 때, 머리를 스스로 서걱서걱 자른다. 파이몬을 피터에게 보내기 위해. 결국 파이몬대왕의 숙주가 되어 조안이 왕관을 피터에게 씌워주고 목이 없는 엘렌, 애니 외에 다른 목이 없는 사람들과 나체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있다. 굉장히 기이한 장면이다. 축하하는 듯한 배경음악은 마치 파이몬의 해피엔딩과 같았다.
유전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듯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엘렌의 가족으로 태어난 애니, 애니의 자식들인 피터와 찰리는 파이몬대왕의 숙주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는 한, 모든 무의식적인 행동이 같은 결말을 향해 가도록 돕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 애정, 끌림이 모두 유전자에 의해 이미 정해져있다는 이론에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는 후에 책에 모든 행위가 유전자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위로?의 글을 첨부했으나 나만의 의지와 감정인 줄 알았던 나의 자아가 그저 이미 정해진 명령어를 따른 것은 아닐까 하는 찝찝함과 무력감, 서글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주도권이 없는 무력한 인간의 운명을 공포로 보여주었다. 꺅 하고 무서웠다가 끝나면 하하 별거 아니네 털어버리는 공포영화와 다르게 꽤나 길게 음울한 공포의 여운이 남는다. 오컬트 영화지만 유전은 과학이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