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파도 속에서는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 영화 <사랑의 시대>와 <재키>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디톡스 주간을 보내고 있다. 퇴근 후 홀로 영화관을 찾는다. 종로, 명동, 광화문 혹은 압구정. 야근이 없는 날이면 대개 여덟 시께 상영하는 영화를 볼 수 있다. 저녁 먹을 여유는 없지만 아무래도 좋다. (디톡스는 굶으면서 하는 거다.) 행여 야근의 냄새를 맡게 되더라도 무조건 피해야 한다. 광고주의 전화 한 통 때문에 예매한 표를 취소해야 한다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일 거다.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참 다행이다.
팝콘 봉다리를 손에 쥐고, 객석 한 구석에 몸을 파묻는다.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 영화를 보러 간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대던 동전 한 닢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허전함. 대신 카라멜 팝콘을 한 움큼 집는다. 상영 시작 전이지만 허기를 채우려고 입 안에 밀어 넣는다. 달랠 수 없는 정신적 허기를 달래러 영화관에 왔건만, 몸은 배고픔에 먼저 반응한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커다란 은막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봐도 원하는 답은 얻을 수 없음을, 지독한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이다. 영화는 사라짐의 예술이다. 한 번 지나간 쇼트는 다시 붙잡을 수가 없다. 인터넷을 뒤져 그 영화를 다시 찾아 낸다해도 무용(無用)하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객석에 불이 들어오면 영화와의 만남은 끝이 난다. 상영관 비상구를 나설 때, 우리는 그 찬란했던 조우의 순간을 어둠 속에 남겨두어야만 한다. 디(de-)톡스란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리움만 남는다. 육성으로 허, 하고 탄식을 뱉게 했던 장면들을 다시 보고 싶다. 그 순간을 손에 움켜쥐고 싶고, 박제하여 멋진 액자에 걸어놓고 싶다. 하지만, 무심하게 흘러가 버린 시간은 가슴을 애태운다. 아슬이 먼 저 아름다운 별처럼. 말라붙은 그 흔적이라도 만져보고 싶을 때, 글을 쓴다. 또 한 번의 디톡스, 욕망의 배출.
이번 주엔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사랑의 시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재키>.
코펜하겐에 사는 안나와 에릭 부부는 상속받은 큰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로 한다. 공동체 생활이란, 70년대 북유럽에서 유행했던 사회민주주의 실험의 하나다. 다섯 남자와 다섯 여자가 한 집에 산다. 다수결로 새로운 구성원을 초대하고, 규칙을 세우고 안건이 있을 때마다 회의를 연다. 월세는 낼 수 있는 만큼만 낸다. 종종 큰 소리가 나긴 하지만 모두 행복해보인다. 그들의 집은 이상하리만큼 행복한 공간이다.
집 밖은 다른 세상이다. 유명 아나운서인 안나는 TV에서 매일 끔찍한 뉴스를 전한다. 살인과 범죄, 그리고 전쟁. 삭막한 흑백 TV 화면은 온기 가득한 집 안의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단절된 두 공간. 흥미로운 건 세 사람을 제외한 공동체의 그 누구도 이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릭과 안나는 매일 출근을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딸 프레아는 학교를 가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 피터를 만나러 간다. 그 외의 인물들은 늘 집 안에서 식사를 하거나 회의를 한다. 오직 집(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가상의 존재들처럼 느껴질 정도다.
집 안과 집 밖. 두 공간 사이의 단절은 한 여인의 등장으로 금이 간다. 에릭의 새로운 연인 엠마. 젊은 여제자와 사랑에 빠졌음을 털어놓는 남편에게 안나는 그녀를 공동체에 초대하자고 제안한다. 남편의 연인과의 동거라는 이상한 제안. 그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그녀의 고육지책이었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바람을 피운 에릭이 떠나간다고 해서 코뮨(Commune)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안나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에릭을 포함한) 공동체가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열 명이 함께 할 때 그것은 현재(Present)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떠나는 순간 "찬란했던 사랑의 시대"는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찬란했던 사랑의 시대"라는 말은 이미 그 자체로 과거형이다.
집 안과 공동체의 시간은 어느 한 시대에 멈춰있다. 토머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70년대 공동체 생활의 추억을 연출에 담았다고 했다. 박제된 시간. 그리고 집 밖을 나서지 않는 어른들은 그 시대에 머무는 유령들과 같다. (어른이라고 말했다. 그 정체된 시간을 견디지 못한 어린 소년은 그만 죽어버린다.) 안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을 매어두려고 발버둥친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선택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또 한 명의 여인, 또 한 편의 영화. 존 F. 케네디 전(前) 대통령의 부인 재키(Jackie)가 있다.
카멜롯, 그 순간을 잊지 말아요
재키에게 시간은 더 가혹하게 군다. <사랑의 시대>는 천천히 저물어 가지만 <재키>의 카멜롯은 총성이 울린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영화는 존 F. 케네디 암살의 전후 일주일을 다룬다. 케네디의 장례를 치룬 뒤 재클린 케네디는 저택에서 한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 진실에 목말라하는 기자를 앞에 두고 재키는 과거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백악관에서 지내던 나날들, 케네디 대통령과의 관계, 그리고 남편이 총에 맞아 쓰러지던 광경까지. 오직 그녀 자신만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이야기. 한참을 이야기 한 뒤 (재키의 과거 이야기들은 플래시 백으로 진행된다.) 그녀는 꼭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절대 기사로 내보낼 수 없어요."
과거란 폐쇄된 시간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훔쳐볼 수 없는 대통령의 처소처럼, 당사자 외에는 들여다 볼 수 없는.... 아니, 당사자에게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재키는 지나간 순간들을 붙잡아보려고 애쓰지만, 기억은 점점 아스라히 사라진다. 나도 벌써 잭(존 F. 케네디)의 얼굴이 가물가물한데, 사람들은 일주일이면 잊어버리겠죠! 그녀의 절규는 비통하다. 결국 케네디 가(家)의 시간은 마치 카멜롯과 아서왕 이야기처럼 한 편의 동화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진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고.
재키 역시 과거에 집착하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링컨의 위대한 업적을 동경하고, 문화 유산 복원사업에 전념한다. 안나가 공동체를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재키 역시 존 F. 케네디의 흔적을 남기려 애쓴다. 성대한 장례식을 계획하고, 백악관의 인테리어를 바꾼다. 그럴수록 왠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재키를 화면 정 가운데 붙잡아놓는다.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인물을 가상선 중앙에 위치시키는 카메라는 흔하지 않다. 1.85 대 1 비율(과거 흑백 TV 장면에서는 1.33 대 1 의 비율을 사용한다.)의 사각형 스크린 안에 그녀는 박제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액자 안에 갇힌 초상화 같은 인물.
허상과도 같은 역사의 감옥에 갇혀버린 재키를 구원하는 자는, 얼마 전 작고한 존 허트가 분한 한 목사다. (존 허트의 팬이라면 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 장례를 치룬 뒤 재키는 그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청한다. 그녀는 쌓아두었던 분노와 고통을 모두 털어놓는다.
"하나님은 잔인한 분이군요. 왜 두 아이의 아버지를 데려가셨을까요. 제가 죄인이라서?"
늙은 목사의 답변에 헉, 하고 숨이 막혔다. 교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인데 새롭게 느껴졌다.
"아니요,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고통을 주신 이유는,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 말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결국 어떤 시간이든 흘러가고야 만다. 뜨거웠던 사랑도 언젠가는 식고, 단단했던 공동체도 무너지기는 쉬운 법이다. 사람은 결국 늙고 병들어 사라진다. 중요한 건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 모두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화양연화에 목매기 마련이다. 사랑의 시대에 집착하는 안나처럼, 카멜롯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재키처럼.
모든 그리움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그 거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떠나간 것들, 사라진 것들이 눈물나게 그리울 땐, 어떻게 해야할까.
솔직해지자. 고해성사를 하며 눈물 흘리던 재키처럼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하자. 남편의 젊은 연인에 대한 분노에 오열하던 안나처럼 감정을 폭발시키자. 지나간 시간들을 하나 둘 흘려 보내자. (역시 디톡스가 중요하다!) 묵은 것을 내가 온전히 떠나 보낼 때 비로소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인가? 다짐하긴 쉽지만 실천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게다. <사랑의 시대>와 <재키>는 그렇게 당신에게 도전하는 영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