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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Mar 13. 2019

엄마의 ther·apy

마음이 복잡할 때 나는 청소를 합니다.

상자 안에는 김치, 쌀, 쌈장, 고추장, 돼지고기, 아이스 팩 두 개, 그리고 60*150 사이즈의 러그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완전히 밀봉된 김치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붉게 물들인 것 말고는 한 방울도 새지 않았고, 아이스 팩 덕분에 돼지고기는 아직 단단하고 차가웠다. 반찬 통에 김치를 썰어 넣고, 쌀통에 쌀을 부은 다음 쌈장과 고추장을 냉장고에, 돼지고기는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는다. 저녁엔 돼지고기 넣어서 김치찌개를 끓여 먹어야지,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맥주가 좋을지, 막걸리가 좋을지 잠시 고민한다.


러그를 털어 침대 옆에 길게 깔아 놓으니 맨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처럼 방이 화사하다. 내 침대와도, 침대 옆 몬스테라 조화 화분과도 잘 어울린다. 고요하고 평온한 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기운이 차오름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샹달프 만다린 오렌지 그린티 티백을 머그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따른다. 하얀 김이 살랑살랑 피어오르고, 러그 위에 앉아 유진목 시인의 [식물원]을 펼친다.


그러다 갑자기 엄마가 택배를 받으면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방문 앞에 서서 한 장, 방 모서리에서 한 장, 감사의 멘트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고, 스무 개가 넘는 혼합 실로 짱짱하게 엮여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러그를 다시, 유심히 본다. 몇 년 전부터 겨울이면 엄마는 인터넷으로 실을 주문해 컵 받침, 파우치, 방석, 러그, 담요, 가방까지 다양한 뜨개질 작품(?)들을 만드는 것을 취미생활로 하고 있다.

엄마는 뜨개질이 최고라고 했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은 모든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게다가 어느 순간 결과물이 나오니 이보다 좋은 취미생활이 어디 있겠냐고. 겨울이 되면 엄마의 손에서는 코바늘과 실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엄마의 시간은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처럼 뜨개질하는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엮이는 실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간 위에 내가 앉아있다.


어렸을 적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가구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던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이미 익숙해진 습관들(그러니까 샤워 전 속옷을 꺼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침대 오른편 서랍으로 향하는)을 바꾸는 게 싫은지 짜증을 내곤 했었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왜 굳이 힘들게 낑낑거리며 가구들을 옮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집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혹은 변덕이 심해서 그러는 줄로 알았을 뿐. 서랍장은 침실에서 거실로, 다시 작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장판을 뜯고, 벽지에 까만 줄을 남겼고 그 흔적들은 오래된 아파트에 지금도 남아있다.


서울살이를 시작한지 정확히 5년이 되었다. 지금의 자취방에서 보낸 세월이 5년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의 재채기 같은 시간을 억지로 늘려서 살아온 것 같아 아찔할 때가 많다. 매년 새해 목표에는 ‘이사 가기’가 있었고 지금보다 나은 조건의 집으로 갈만큼의 상황이 되지 않아 그 목표는 늘 실패로 끝이 났다.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누군가 그 가치를 알아주기를, 그래서 결론적으로 린넨 커텐이 하늘거리는 거실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을 수 있기를. 하하!! 지난 수년의 시간동안 나는 이러한 욕망에 무뎌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시켰고 때로 그 수련이 과해 욕심내어야 할 것들에도 무덤덤해지는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욕망들에 잠식당하려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방을 뒤집는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기도 하다. 침대, 책상, 옷장, 책장, 의자. 뻔한 가구들에, 한정된 공간이지만 침대의 머리 방향이 바뀐 것만으로도, 책상을 창가로 옮긴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공간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리고 내 인생도 이렇게 정리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이고 냉정한 성찰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작은 성취감들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엄마에게 대청소는 일종의 명상이었을 것이다. 구석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근심도 함께 닦아내고, 책장의 책들을 분류하며 뒤죽박죽 복잡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오늘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녹차를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진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는다. 발바닥에 닿는 러그의 느낌이 참 좋다.


'나쁘지 않아...'


엄마의 블랙홀 위에 앉아 소박한 내 방을 본다. 이 방에서 무언가 해날 수 있을 거라고,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알 수 없는 기운이 차오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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