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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Mar 02. 2020

2월의 무성의한 일기장

봄을 기다리며

https://www.youtube.com/watch?v=lJJT00wqlOo

미뤄둔 집안일을 마치고 이제 서야 책상 앞에 앉는다. 오늘은 3월 2일 월요일.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53분이다. 여러 장소, 사람들이 두서없이 섞인 사건의 연속을 꿈속에서 겪고 9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밝은 아침이 내 방을 깨운 지는 이미 오래.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하늘은 지난 몇 주간의 공포를 전혀 모르고, 나 역시 모두 다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틔운다. 핸드폰을 손에 쥐자 핸드폰은 잠깐 사이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내 얼굴을 인식한다. 집에 있으니 이게 편하군. 나의 가벼운 마음은 포털 사이트 접속과 동시에 굳어버린다. 지난 밤 예상했던 오늘 아침의 뉴스들이,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한다. 하룻밤 사이에 확진자가 얼마가 늘었는지(이제 놀랍지도 않아, 그럼에도 서늘한), 공공의 적이 된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기자회견이 있을 거라는 소식(역겨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훗!), 모두가 힘든 이 와중에도 언제나처럼 특별히 더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이 가진 온기를 나누려는 따뜻한 사람들 이야기에 그래! 힘이 나다가도, 누구보다 그래야 할 사람들은 지금의 공포를 이용하려는 모습에 분노하게 된다. 포털 사이트 창을 닫고, 수도쿠를 연다. 짧은 집중과 소소한 만족감. 음악을 재생하고, 청소기를 민다. 이불 커버를 바꾸고, 빨래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나는 다시 뉴스와 멀어진다. 


텅 빈 거리, 사람을 기다리는 상점들, 사납금을 못 채워서 전전긍긍하는 택시기사, 집에 가지 못하고 탈진한 의사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고 접촉이 공포가 된 지금, 미래의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어서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시간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견뎌내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들은 남는다. 답을 찾다가 길을 잃게 되는 질문들. 과연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Nu - Fool (feat. Jo.Ke)

https://www.youtube.com/watch?v=z8tgc9xahJU

엄마와 함께 동네 시장에 다녀오던 길에 그를 보았다. 그는 우리 앞에 있었고, 그가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2분 동안 나는 차마 그의 뒷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시선을 떨구었다. 그가 사라지고 5분 정도 그를 생각하며 우울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를 잊었다. 그리고 며칠 뒤, 온 가족이 (루도 함께) 역시, 시장에 장을 보러 들어가는데 열 걸음 앞에 그가 있었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회색 츄리닝 바지에 짙은 녹색 후드티, 전날과 같은 옷을 입고 박스 몇 개를 초라하게 담은 끌낭을 끌면서 육중한 몸을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걷는 게 힘든지 벽을 잡고 잠시 쉬었다. 그의 몸은 거대했다. 뚱뚱한 게 아니라 거대한 몸. 부어오른 발목은 그의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고, 그에게 한 걸음은 걸음이 아니라 질주와 같았다. 


시장에 가면 그를 종종 본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삶이 너무 힘겨워보였고, 혼자 괜히 감정적으로 버거워 시선을 돌리곤 했다. 아마 그와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 감정을 가지고 그를 볼 것이다. 그도 알까? 아마도 알겠지. 20대 초반, 아무리 많아도 아직 서른은 되지 않은 것 같은 그의 체형은 살이 쪄서가 아니라 어떤 치료 불가능한 병으로 인한 것이라는 내 멋대로의 추측을 하게 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리고 그런 그가 박스 (많이도 아니고)두 세 개를 모으기 위해 상점을 전전하는 모습, 그렇게 느려서야 언제 박스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 모으겠는가? 그러다가 내가 뭐라고 남의 인생을 재단하는가 싶어,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까맣게 그을린, 세수는 했을까 싶은 그의 얼굴에는 ‘원망’이 없었다.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는, 삶에 요구하는 것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숨이 가빠서 피곤해보이긴 했지만 글쎄, 이것역시 나 혼자만의 착각이고,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지도. 


그를 보는 것이 불편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를 그의 지금 모습에 대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을 알지 못한다. 단지 미루어 짐작할 뿐. 이 얄팍한 연민이 나를 괴롭힌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살아내는 것. 삶의 의미는 그것이라고. 살아내는 것.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aXnfhnCoOyo

시오타 치하루(1972~)의 전시 역시 내게 굉장한 감동과 힘을 주었다. 강렬한 떨림과 긴 여운을 주는 전시였다. 그의 전시를 보고 수 년 만에 삶이라는 것이 다시 신비롭게 다가왔는데 그의 작품이 긍정의 힘을 주어서가 아니라, 고뇌와 성찰, 그 과정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몰랐던 작가였는데 그를 알게 되어 또한 기쁘다. 현대 미술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표현들은 내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부자들과 평론가들 마음대로 가치를 매기는 거라고 치부, 공감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런 선입견을 깨주는 대단한 작가들이 있다. 내게는 빌 비올라가 그러했고, 최근에는 시오타 치하루가 그러했다. 


2월에는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다. 극장은 물론이고 넷플릭스와 왓챠에서도. (이번 달, 넷플릭스를 해지하고 왓챠에 재가입했다. 이유는 왓챠에 내 취향의 영화와 드라마가 더 많기 때문.)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가 필요한 요즘이지만 이상하게 영화는 ‘보고싶어요’ 리스트만 채워나갈 뿐, 가벼운 드라마만 계속해서 보고 있다. 아무튼 왓챠 덕분에 아빠가 <왕좌의 게임>이라는 엄청난 드라마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 소개하고픈 많은 명작 드라마들이 왓챠에 있어서 기쁘다. 

https://www.youtube.com/watch?v=97_VJve7UVc

존 버거의 <photocopies : 글로 쓴 사진>을 읽었다. 그는 최소한의 재료로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와 같다. 속임수나 잘난 체는 없다. 적확하게 대상을 간파하고 그대로 옮긴다. 그런데도 재수가 없다거나 지루하지 않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그의 글이 ‘그’라는 사람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러니까 닮고 싶은 사람이랄까? 그의 글은 전체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분을 옮기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그가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묘사한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그를 쳐다본다. 여든여섯인데도 마치 흐르는 세월과 특별한 계약을 맺은 것처럼 나이가보다 젊어 보인다. 찌를 듯한 연푸른 눈이었는데, 마치 냄새를 탐색하는 개가 코를 찡그리듯 이따금씩 눈을 찌푸렸다. 그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가 얼마나 무딘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눈이지만, 순결하다기보다는 관찰에 중독된 눈이다. 눈이 영혼의 창이라면, 그의 창에는 유리도 커튼도 없으며, 그는 늘 창틀 곁에 서 있고 어느 누구도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 너머를 볼 수가 없다.”


muzik lists

1. Sufjan Stevens, "Should Have Known Better"

2. Nu - Fool (feat. Jo.Ke)

3. Nick Drake - Pink Moon

4. [조성진 Seong-Jin Cho] Debussy Claire de lune 드뷔시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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