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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Oct 04. 2021

Runner’s log

2. 안개를 헤치고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길이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논둑길이든, 산길이든, 해변가든, 빌딩 숲 사이든, 학교 운동장이든, 어디라도 달리는 리듬에 크게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지난 일 년동안 항구 주차장과 그 주변 바닷가 길을 달려왔다. 도심을 달리는 것이 나의 오랜 로망이었으나 그것은 마스크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지금 내가 가진 환경에 충실하자! 하면서 별다른 변덕 없이 찰랑거리는 바닷물, 정박해있는 크고 작은 배들, 낚시하는 사람들, 비둘기를 배경으로 달려왔다.

내가 주로 달리기를 하는 시간대는 아침 일곱시 전후인데 여름에는 부지런한 햇살의 기운이 얼마나 짱짱한지 달리다보면 내가 빛과 열기에 분해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날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여름 아침 일곱시에는 없다. 하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부터의 아침 일곱시는 꽤 근사하다. 차가운 하늘을 힘겹게 뚫고 나오려는 태양이 펼쳐 놓는 황홀한 색들은 매일이 다르고, 그 색을 흡수한 바닷물은 마치 한 폭의 인상주의 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어떤날은 태양을 향해서 내가 달려가고 있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이런 풍경을 보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연에게 인사를 건넨다.

어디라도 길이 있으면 달릴 수 있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수줍은 열정을 토해내는 태양과 그를 경배하는 구름, 그리고 바다가 있는데 내 어찌 ‘어디라도’ 겸손을 떨 수 있겠는가?

하늘은,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멋지지만 그렇다고  매일 감동받고 경탄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같은 코스를 달리는 것이 달리기 리듬를 조절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반복은 역시 결국엔 지루해질 수 밖에 없고, 그날 하늘이 특별히 예뻤다고 해서 그 날의 달리기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다. 시각적 자극은 활력을 더할 뿐, 결국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다. 처음 쉬지않고 30분을 달렸던 7월의 터질듯한 아침. 처음 7km를 달리고 멈추었을때 (달릴때는 몰랐는데)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 처럼 낯설었던 12월의 상쾌한 아침. 까맣게 탄 내 팔 위로 떨어지던 시원하고 다정했던 빗줄기. 그렇게 각인되어 있는 날들을 제외하고는 ‘아침이다! 달리러 나가자! 덮구나! 달리기 시작! 오늘은 좀 힘드네? 후, 후. 아직 2km남았다. 여기를 두 바퀴 돌면 목표 완료다. 아, 갈증나.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스트레칭은 집에 가서 할까? ‘의 반복이다.


추석연휴동안 시골집에 다녀왔다. 지난 8월 이사한 부모님 댁에서 8일을 머물며 비가 내리지 않는 아침에는 집 근처 논길을 달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늦어도 6시 30분에는 나이키런 어플의 시작 버튼을 눌렀는데 이때의 달리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한 체험였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빼곡한 논과 논 사이를 달리며  온 몸으로 가을의 풍요, 풍년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벼 낱알을 쪼아먹는 참새 무리의 가벼운 움직임 만큼이나 내 두발은 경쾌했다.  둘째날 역시 즐거운 달리기였지만 첫째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 왔다. 흐린 날은 아니고, 쨍쨍한 태양 아래로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는데 산 꼭대기에서부터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이 산할아버지 수염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고, 쿠션 같기도 하고, 산요정의 숨결같기도 하고, 보기에  즐거웠다. 어느 순간 멀리에 있던 안개가 내 주위를 덮어버렸다. 달리고 있는 내 시야는 희미해져갔고, 나는 꿈속을 달리는 듯 안개속을 달렸다. 움직임으로 뜨겁게 달아오르 내 팔 위로 촉촉한 안개가 내려 앉았고, 나는 하하하 웃었다. 안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흥분과 약간의 공포를 느낄 즈음 안개는 흩어지고, 이미 하얀 빛으로 변해버린 태양이 저 높이 올라와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안개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그 짧은 시간, 본격적으로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는 그 순간에 내가 달리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 시골에서의 달리기는 신비로운 꿈 과도 같았던 그 모호한 변화의 순간을 온 몸으로 뚫고 나온 것으로 기억 될 것이다.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안정과 지루함을 느끼면서 오늘 아침도 달렸다. 시월인데 여전히 뜨거운 아침, 전날 밤을 세운 낚시꾼이 남기고간 흔적들이 지린내를 풍긴다. 나는 가끔식 다른 곳을 달려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곳, 한 번도 뛰어 보지 않은 곳. 예상과 달리 뛰기에 부적합한 곳이라면 조용히 산책을 해도 되니까. 오늘 아침과 다른 준비물은 필요하지 않다. 아!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수도 있으니 카드가 필요하겠구나. 뛰고 나서 물도 한병 사 마셔야 하고. 음… 그래.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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