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의 작업을 멈추게 한 현실의 이야기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박 작품을 보고 나면 가슴이 뛰었고, 나도 그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아무 밑천도 없는 지망생이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전했다. 공모전 참가, 문예창작학과 수업 청강, 서점과 도서관의 작법서 수집, 현직자에게 받는 피드백 등 꿈이 이뤄지기 위한 조건들을 충족하고자 했다. 언젠가 미래에는 주제도 뛰어나고 통찰이 깊이 담겨있는 좋은 시나리오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제동에 걸린 건 스스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였다. 시나리오 쓰기와 작가는 마음속에서 내비친 요구를 응하기 위한 선택지였을 뿐, 진짜로 원했던 건 내 삶의 실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대박 작품을 보고 나서 뛰었던 가슴은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좋은 작품을 보고 난 뒤에 나의 삶에서도 주인공처럼 나가서 나답게 살아가며 활약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입시가 끝난 겨울 어느 날, 시간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시나리오 쓰기에 도전했다.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입혀서 만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친구와 만나서 함께 웹툰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유럽 중세시대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현대의 이미지를 투영한 퓨전 시대극을 기획했다. 당시에 친구와 할리우드 대작 시리즈들에 빠져있었고 그와 유사한 대박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캐릭터들에게 하나씩 이름과 배경을 부여하고 세계관과 극적인 사건의 에피소드를 준비했다. 막상 실제로 하나의 회차를 만들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려고 하니, 이미 더 재미난 현실의 놀거리들이 우리를 유혹했다. 좋아하는 일이건 아니건, 노는 게 제일 의미 있었던 20살들의 시나리오 아이디어 노트는 책상 깊숙한 곳에 놓여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즐겁게 놀러 다니는 와중에도 시나리오 쓰기보다는 시나리오를 잘 쓰도록 만들어줄 것만 같은 명작 영화 모아 보는 것을 먼저 시작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시나리오 쓰기보다 노는 걸 더 좋아했던 시기에 스스로를 속였던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괴물>, 허준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홍진 감독의 <황해>,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 최동훈 감독의 <타짜>,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대부> 시리즈, <본> 시리즈, <비포> 시리즈, <다크 나이트> 시리즈, <좋은 친구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몽상가들>, <파이트 클럽>, <쇼생크 탈출>,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을 섭렵했던 시기다. 위대한 작품을 보고 나면 내가 쓰게 될 시나리오도 위대해질 것이라는 얄팍한 기대 속에 명작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심각하게 취해 있는 병에 걸려 있었다.
명작들을 두루 보고 몇 권의 시나리오 작법서까지 읽고 난 상태에서 범죄조직 누아르 액션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왔다는 느낌을 내려고 썼던 것이다. 이 정도 작품들을 누비고 왔으면 인정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허공에 던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몇 편을 봤는지, 공부를 많이 하고 왔는지가 아니라 이야기가 귀에 꽂히게 만들 수 있느냐였다.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도록 입체적으로 구성하지 않았고 결말까지 이들이 어떻게 어두운 현실을 해쳐나갈지에 대해서 전혀 감을 못 잡은 상태였다. 좋아하는 영화에서 따온 작품의 분위기나 대사의 톤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키고 통제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럴 때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건 아직 못 찾아본 유명하거나 위대한 작품 더 보고 오기였다.
차츰 놀거리가 떨어지고 한껏 즐기고 싶었던 광란의 시기가 저물어가자 시나리오를 한 번 공부하고 꾸준히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웹툰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친구와 웹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친구와 셋이 모여 스토리 만들기에 대해 공부하고 각자의 작업을 피드백하고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공유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의 시놉시스 형태의 글을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한 작품에 대해서 분석하고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토론했다. 뚝심이 없어서 놓아버렸던 아이디어들을 다시 모아서 짧은 형태의 줄거리로 완성시키고 기록으로 제대로 남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제목과 표지만 익숙해져 버린 유명한 시나리오 작법서를 읽고 핵심 내용을 요약하여 실제 사례에 대한 스터디를 거쳐 공유하기도 했다.
스토리 만들기 모임을 막 결성했을 때, 대학 수업 중 문예창작학과의 영화 시나리오 강의가 눈에 띄어서 고민 없이 바로 비전공자 신분으로 수강 신청했다. 그 강의의 수업 마지막에는 주제, 인물 소개, 기승전결이 있는 줄거리를 담은 시놉시스를 발표하도록 짜여 있었다. 모임에서 플롯이니 3 막구조니 인물의 갈등 같은 요소를 공부하긴 했어도 기존에 알고 있는 명작들에는 범접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수업에 기대서라도 확실히 이해해보자는 것이 목표였다. 어떻게든 수업 마지막에 작품 시놉시스를 발표해야 하고 문예 창작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에게 15분 정도의 피드백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죽이 되는 밥이 되는 완성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름대로 즐겁게 이야기를 써보고자 좋아하는 영화 중 대중성이 높고 주인공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의 스토리 라인을 장면별로 분석해서 그 구조를 차용했다. 또 좋아하는 한국 영화배우들을 그대로 캐스팅하듯이 설정해서 인물들로 설정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사회이슈를 핵심 사건으로 만들어서 서사의 중심에 입력했다. 전체 줄거리를 전공생들 앞에서 읽는 당일 날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으로 기억된다. 강의를 하는 교수가 아니라 같은 학생들이 신랄하게 다른 발표자의 결과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한껏 긴장된 상태로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읊어 나가면서 그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내지는 너무 상투적이어서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지만, 결국에는 그만큼 대중이나 보편적인 감정에는 도달했다는 의미가 담긴 감상이었다. 창의적인 이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읽혔을 때 흡입력이 있을 만한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나리오 써보기를 시작한 이후에 처음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룬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친김에 웹툰 플랫폼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 연달아 2번 응모를 시도했다. 한국의 상황과 정서가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을 대중적인 코드에 녹여내려고 한 SF 액션 장르였다. 특히 할리우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전성기 한가운데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적인 설정과 인물들이 등장하는 SF 액션은 사람들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조금은 상기된 상태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웹툰의 작화를 담당했던 친구와 함께 우리가 봐도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로 시작했다. 결과물이 나왔을 때는 평소에 즐겨보는 마블 영화들을 감상했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당선작으로 꼽히지는 않았지만, 시놉시스 한 편을 만드는 데 허덕였던 과거에 비해 좋아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 쓰기에 있어서 마지막 도전은 직업으로서 삼기에 충분히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테스트해보는 구직 과정이었다. 실제로 준비했던 웹툰 PD라는 직무는 웹툰 작가들이 창작한 이야기가 시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기획해서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작품을 여러 번 직접 기획한 경험과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일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알아보는 시기였다. 기능적으로 여러 웹툰 스토리를 또 기획하고 분석하면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 반복해서 물어본 것이다. 같은 시기에 웹툰과 관련이 없는 비즈니스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포털이나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기기에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지 않아도 내 인생에도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이야기가 이미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비즈니스 프로젝트에서는 하루하루 겪는 문제들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매일 다른 반응과 결과가 나타는 일상을 겪고 있었다. 꼭 비즈니스 프로젝트가 아니었더라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현실적인 무대에서 내가 겪는 과정을 통해 느끼는 진실과 리얼리티가 작품 속에서 발견한 것들을 앞지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때였다.
호기롭게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라고 말을 했던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상상했던 꿈은 작품 속 인물들처럼 다양한 경험도 가지고 싶고, 나만의 특별한 추억 같은 것들을 쌓고 싶었던 것이다. 그 멋진 일들을 아직 현실 속에서 창조해내기는 두려움도 있고 겁이 있었기 때문에 가상의 공간에서 그 결핍을 풀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시나리오 쓰기에 도전해서 냉정하게 나의 작업에 대해 평가를 내려주는 문예창작학과에 참여했던 것처럼 삶의 이곳저곳에서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늘려가고 다양한 나만의 경험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수동적이었던 인물의 과거가 목표와 동기가 생긴 인물의 결정과 행동에 따라 변화를 겪는 시나리오 작법처럼 스스로의 경험에 의미가 투명하게 나타났다.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외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건 시나리오 상으로 크게 중요도가 없는 장면으로 간주된다. 그 인물이 어떤 계기에서든 움직이고 도망 다니고 탈출하고 갈등을 만나 해결할 때에 만 같은 장면에 주목도가 확 달라지기 마련이다. 한참 좋아했던 영화들의 이야기와 멋진 배우들이 연기했던 인물들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자신의 삶에서 발견했을 때부터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현실의 선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앞선 시나리오들에서 투영했던 한국의 상황과 배경은 내가 살아갈 현실이었고, 그 이야기들에서 내릴 인물의 갈등과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현재였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은 과거의 경험 속에서 매 번 다른 선택지를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