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
무지개는 물과 빛과 공기가 만드는 이상 현상이다.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특정 조건이 맞으면 사람에 눈에 일곱 색의 서로 다른 빛이 보인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도로시는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노래를 부른다. 희망을 무지개와 그 너머의 공간에 투영했을 때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분명 더 이상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것이다. 평소에 하늘을 쳐다볼 때는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않다가, 비일상적인 무지개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감상을 낳는다. 눈으로 보는 것은 이만큼 사고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영화는 무지개보다 훨씬 더 많은 빛과 장면으로 관객을 현혹시키고 다양한 자극을 입힌다. 무지개 하나 만을 보고도 소원을 비는 인간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온갖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잡하고 풀기 어렵지만 이해하고 의미를 깨닫고 나면 어떤 기분일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은 무지개 너머 영화비평의 현장이었다.
1년에 한 번씩 개봉되는 할리우드 대작만 알고 챙겨보던 소년에게 영화가 가진 다양한 매력을 소개해준 건 미디어에 노출된 영화평론가의 영화 이야기들이었다. TV 프로그램이나 짧은 클립 영상뿐 만 아니라 글을 통해 리뷰의 재미를 알려준 건 씨네 21 잡지였다. 영화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편집을 담당하던 필자들은 상당한 영감을 주었다. 김영진 평론가의 <평론가 매혈기>, 정성일 평론가의 <필사의 탐독>, 허문영 평론가의 <보이지 않는 영화>, 김혜리 기자의 <영화야 미안해>, 이동진 평론가의 <부메랑 인터뷰> 등 영화 비평집은 영화에 대한 글을 한 번쯤 써보고 싶게끔 이끈 운반자들이었다. 좋은 비평글을 섭취하고 나서 한 번쯤 나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먹어보자는 결심이 처음 생겼던 건 천만 관객이 하나의 익숙한 문화가 되었을 때였다.
천만 관객 영화 탄생의 초기에는 역사적인 대기록으로 인식되었지만, 1년에 한 편 정도 등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한 시점에 왜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 영화에 쏠리는지에 대해서 궁금했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영화였기 때문에 쉽게 나의 감상과 더불어 글로써 표현을 하고자 했다. 했으나 완성도 있는 글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좋아하는 영화평론가들의 글에 대해 익숙했기 때문에 처음 써 본 글이 형편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짐작에 쓰는 것을 멈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만 영화가 아닌 그 영화를 본 사람들에 대해 써야 했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 시대적 담론에 대한 이해가 없이 쉽게 세운 가설과 아이디어로 글이 구성될 것에 대한 만족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감상문을 써서 좋았던 장면이나 기억하고 싶은 배우의 연기를 기록하는 것과는 다른 영역이라고 여겼다. 통찰을 요구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라면, 구체적인 답변을 성실하게 준비해서 최소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욕심을 가졌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었고, 매체에 기고하거나 발표할 글도 아니었지만 정말로 좋아하게 된 대상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영화비평글을 써보기 위해 참고한 다양한 분야의 이론과 서적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구성 요소에 대해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를 알려주었다. 기본적인 영화사와 영화에 대한 주요 개념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개봉되는 영화들의 출신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장르나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영화의 재미가 극화되고, 최근까지 작품을 내놓고 있는 감독들이 역사의 산증인인 경우도 있었다. 서사성, 디자인적 감각, 신화적 스토리텔링, 심리학적 인물 묘사, 미디어 시장 논리에 따른 작품 출시와 같은 영화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두루 살펴봐야 했다. 또 영화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장면과 인물들에 대해 풀어서 쓰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역사적 사실을 참고해야 했다.
처음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평론 글은 <봉오동 전투>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의 초기 단편작인 <빵과 우유>를 보고 나서였다. 철도청에서 해고당한 노동자가 빵과 우유를 들고 기찻길을 거닐다 생기는 이야기였다. 혼자서 등장하여 인물 간 갈등은 없지만, 해고당한 노동자라는 배경과 기찻길 위에 떨어진 큰 암석을 치우는 액션을 엮어서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의견을 적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첨삭을 하고 피드백을 주는 모임에서 쓰고 발표한 글이었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모임장이었던 영화계 종사자는 내 글에 대해 처음으로 나쁘지 않았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훑는 능력은 연마해야겠지만, 개념에 대해서 파악하고 인물의 감정과 연결 지어 쓴 점이 인상적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작은 칭찬이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장점으로서 격려를 받을 때는 더 큰 용기가 만들어지는 시간으로 승화되었다.
모임에 있었던 다른 참가원들의 글을 읽었을 때 나와 다른 여러 관점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재미를 느껴 영화 비평을 쓰기 위해 다양한 비평글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1951년 프랑스에서 창간된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의 역사를 다루는 책을 읽고 21세기 한국에서도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날 법도 하다는 설렘도 있었다. 실제로 영화 비평을 쓰도록 도와주는 매뉴얼과 가이드 책들도 참고하여 꾸준히 여러 편의 글을 쓰기 위한 준비도 했다. 단순히 감상과 영화에 대한 소개로 리뷰하지 않기 위해 여러 질문에 답하는 연습을 했다. 비평하고자 하는 영화는 왜 선정했는지, 그 영화에서 어떤 장면을 어떤 시각으로 비평할 것인지, 그 장면에서 어떤 텍스트를 또 어떤 시각으로 비평할 것인지, 집요하게 질문을 만들고 끈질기게 답해야 만 튼튼하고 구성이 조화로운 글을 쓸 수 있었다. 질문을 거듭하면서 영화 선정과 비평 대상의 폭을 어느 정도 주제와 폭을 좁힐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평론 글을 써야 한다면 사회적 이야깃거리를 풀어낼 수 있는 칼럼 형태의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영화이든, 예술영화이든, 영화를 보는 관객이나 산업에 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의 사람들이나 현실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중간에 놓고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의미 층위들의 틈에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이슈나 사안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다. 영화 내부적인 이미지 만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외부적인 콘텍스트를 배제했을 때는 이야기에 생기가 말라져 버린다고 느꼈다. 현실과 맞물려서 들었을 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을 만한 글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영화를 선정할 때는 특정 주제에 대해 원색적인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여러 질문을 남기는 작품을 우선으로 골랐다. 어떤 영화이든 한 주제에 대해 절대적으로 중립적이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결말과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최종 메시지가 어떻게든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 의견에 대해 동의를 할 때도 고개가 갸우뚱 해 질 때도 있었다. 찬성과 반대여부보다 비중 있게 다루려고 했던 것은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와 장면 구성과 서사방식이었다.
<문라이트>라는 영화의 경우, 개인이 하나의 온전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의 영화로 읽었다. 인물 본인이 느끼는 기분이나 자유로운 정서가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정서를 유발하는 장면들의 분위기와 심리적 묘사에 주목하고자 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경우, 1960년대 주류 남성들에게 거세된 사랑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는 영화로 봤다. 당시 시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를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 특징과 영화 속 상징을 연결 지을 수 있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로 이야기를 따라갔다. 실제로 가슴이 철렁하듯 해맑은 유아들이 위험에 놓여 있는 사실에 몰입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리얼리티를 표현하기 위해 묘사한 촬영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이렇게 각 영화별로 남긴 형식과 구조가 다른 건 감상을 할 때마다 항상 겹치지 않은 질문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영화비평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저마다의 의견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영화비평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나가는 행위는 영화 바깥세상을 다층적으로 보는 경험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해석하고 상상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은 각 사안들에 대해서 나만의 합리적인 의견을 구성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다. 그 의견을 구성하고 층위를 두껍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도출해내는 방정식을 구상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의 입장이 있을 것을 고려하고 그중에서 질문에 대해 적절한 이야기를 만드는 행동을 취해야 했다. 비평하려고 한 영화에 맞게 떠오른 궁금증을 하나씩 정리하고 단서를 풀어나가다 보면 영화에서도 보지 않았던 장면이 하나의 이야기로 편입되기도 하고, 영화에서 봤던 장면이 실제 사건이나 인물로 겹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비평을 쓰는 글쓴이가 세워 놓은 비평글 내부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
도통 결말에 대한 의미를 모르겠어서 포털 검색 창에 '영화 결말 해석'을 검색해서 모르는 것을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뉴스에서 등장하는 시사 이슈들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그 사안에 대한 답을 기사에서 찾으려고 하기도 했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관계망 속에서 벌어지는 잦은 긍정적, 부정적 결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생선배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인의 격언을 떠올리며 문제를 바라보려고 할 때도 있었다.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복잡한 현실의 연속에서 한 번씩 쳐다볼 수 있는 무지개는 하나의 명확한 답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희망 노래였다. 무지개 너머 끝까지 가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에 붙잡은 하나의 수단이 영화비평이었다. 영화비평글을 쓰면서 어려운 문제의 의미를 깨닫고 이해하면 그 기분은 무지개 너머에 도착한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평을 쓰기 위해 평론집도 찾아보고, 잘 몰랐던 배경 지식도 공부하고, 직접 써 내려가면서 어느덧 무지개와의 거리가 좁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봤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똑같은 현실이었다. 무지개는 시간이 지나서 보이지 않았지만 무지개를 바라보며 소망을 기원했던 나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