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삶은 어렵지 않다. 그의 시도 난해하지 않다. 역사가 황망할 뿐이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자꾸 찾게 되고 떠오르는 윤동주의 시는 다급한 마음에 균형을 맞춘다. 돈이 중요한 시대여서, 잘 나가는 것이 우선인 사회여서, 나를 위해 애쓰는 것이 당연한 삶에서 하필이면 부끄러운 문장을 찾을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이고, 오르지 않은 산은 높아 보이는데 시의 소용을 잊지 않은 건 왜 일까. 마치 호흡처럼 들이마시고 내뱉지 않으면 모든 기관이 멈추듯이 정직한 언어가 코와 입을 통과하지 않으면 삶을 할 수 없다. 그의 문장은 솔직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쓰는 단어와 표현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나타낸다. 윤동주는 젊음을 간직한 한국 현대사 거울이다.
윤동주가 처음 공부를 시작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문익환을 만난 건 1925년 9살의 나이에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그가 문장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무렵 바깥 세계에서는 함부로 언어를 쓸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부터 쓰고자 하는 자와 쓰지 못하게 하는 자의 대립이 완강하게 대치했다. 원래 사용하던 언어를 지우고 강자의 언어를 쓰게 하는 교육은 점점 더 강화되었다. 그 결과로 강자의 언어를 따라서 쓰는 자, 복종하는 자, 새로운 언어 형태를 만드는 자, 저항하려는 자 등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윤동주가 즐겨 읽고 가방에 시집을 넣고 필사했던 정지용이나 백석 시인은 국문을 기반으로 하는 문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자연스럽게 뿌리가 있는 언어를 보고 자랐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송몽규가 1935년 19세의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부분에 당선된 뒤로 자극을 받은 윤동주는 본격적으로 습작에 돌입했다.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생각이 담긴 작품들은 시인의 의중을 드러낸다. 강요에 의해 다른 나라가 섬기는 신에 절하는 문화를 거절함과 동시에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한다. 당시에는 총과 칼로 정치를 하는 분위기가 심화되고 문장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리한 조건이 내걸어진다. 모여서 말을 못 하게 되고 조직활동에 차질이 생긴다. 이에 따라 개인들은 개인들의 이야기를 담아가기 시작한다. 한국어는 개인의 일상을 그리는 언어로서 새롭게 인식된다. 윤동주 또한 자신 스스로 학교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을 시로 표현했다. 처음으로 본 바다, 수학여행에서 쌓은 추억, 좋아하는 여학생에 대한 감정을 쓴 건 누가 봐도 어렵지 않은 삶이었다.
명동학교 교사였던 윤동주의 아버지는 직업을 본격적으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진학 문제에서 의대나 법대를 주문했다. 진로 문제로 대립 끝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문과 대학에 입학했다. 1937년 21세의 나이에 들어간 때, 세계는 전쟁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가는 곧 군인 사회로 변형하기 위한 실행을 해나갔다. 윤동주보다 앞서 문학의 부흥을 주도했던 단체들은 강제로 해산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어로 된 글을 써서 돌려보거나 모여서 낭독하는 행위는 군대에서 허락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명령을 어긴 군인은 처벌을 받듯이 한국 문학을 만드는 건 하면 안 된다고 일러 준 일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1938년 한국인은 세계 각국의 이권 쟁탈 싸움에 차출되는 법에 의해 불려 나갔다. 1939년에는 한국식 이름을 지우고 다른 나라의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제 조치가 내려졌다.
어지러운 현실에서 윤동주는 원했던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문과 2학년부터는 기숙사에서 나와 북아현동과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평소 존경하던 정지용을 방문하고 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때부터 신문과 잡지에 원고를 발표했다. 1939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문학적 업무를 하며 작품을 남겼다. 그러던 1939년 9월 이후 1940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1940년 12월 말부터 다시 시를 쓰고 부끄러운 감정을 화두로 삼은 작품을 만들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은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1941년 이후에는 한국에서 한국어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한국어 신문과 잡지는 모두 폐간하게 했다.
한국어 사용 금지라는 정책에 대해 한국어로 먹고살고 또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여러 반응을 보였다. 이야기를 통해 정책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이 있었다. 소극적으로 침묵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활동은 중단하고 현실을 묵묵히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종교, 언어, 문화를 인정하고 함께 참여하는 방법도 가능했다. 당시에 힘을 가진 나라에 반발한 결과는 군인이 군대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처벌보다 더 혹독하게 대응했다.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개인의 의견을 낼 수 없는 군인 사회는 능동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만 필요로 한다. 자기 언어와 문자를 상실한 문필 업자들은 이중 언어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3월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를 쓰고 유학을 떠난다.
참회록
_1942년 1월 24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는 유학을 가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다른 나라의 언어로 공부를 했다. 시는 오직 한국어로 썼다. 한국어가 금지되었을 때 만든 한국어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부는 경찰들에게 들키지 않고 그가 죽은 뒤에 발표되었다. 군사정권을 통해 정치했던 나라가 물러가고 한국어 사용이 자유로워진 1947년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글과 함께 윤동주의 시가 실렸다. 고작 3년 전 경찰에게 체포된 윤동주는 한국어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 별세했다.
경찰과 군인이 단속하고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감정과 어려움이 교차한다. 힘에 대해 인정하든, 반대해서 다른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든, 그리고 결국 힘이 이겨내든, 어쩌지 못하는 상처와 마음은 치유가 필요하다. 좋지 않은 일에 대해 고발하지 못하는 불편함, 군중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 생긴 두려움, 같은 이웃을 버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괴로움, 희망이 짓밟혔을 때의 무력감 등은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언어다. 언어는 또 다른 문으로 읽고 쓰지 않는 이상 의식을 바꿀 수 없다. 윤동주의 문장은 역사에 비어 있는 기억을 한국어로 된 문장들로 든든하게 채우고 있다. 문장 속 주인공은 힘을 원하기보다 스스로를 찾고 있다. 그 많은 증오와 원망은 역사의 한구석에 서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맞바꿀 수 있다. 누군가 불러오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자꾸 찾게 되고 떠오르는 건 그 안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부끄럽다는 말이다.
우리는 윤동주가 될 수 있을까. 결국 자기 삶을 돌아보며 질문한 사람 만이 대답할 수 있다. 열심히 사는 건 쓰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삶이다. 힘에 부합하려 만든 문장은 교체된 힘에 의해 함께 날아간다. 그래서 힘과 함께 사는 삶은 어렵다. 대신 문장으로 쓰기에는 쉽다. 질문하지 않아도 힘이 시키는 대로 쓰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삶은 쉽다. 하지만 윤동주는 시 쓰기를 어려워했다. 그리고 쉽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쉽게 씌여진 시는 언제나 부끄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