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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May 15. 2024

영웅은 무얼 보았나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

시리즈의 장대한 개막을 알렸던 1968년작까지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2011년에 시작되어 2017년에 마무리된 지난 삼부작은 그야말로 정방형의 완벽한 서사였다. 시저의 탄생과 그 존재의 자각, 그리고 이어지는 민족 영웅으로서의 변화는 인류 퇴화의 반대편에서 맞물려 진행되며 시리즈의 팬과 일반 관객 모두를 흡족하게 만든 바 있었다. 특히나, 새 시리즈를 이끌어온 구심점이었던 시저의 장대하고도 숭고한 죽음은 이것이 바로 마침표라고 감독이 선언한 듯 보여 더 만족스러웠다. 이쯤하면 시리즈로써 할 이야기는 다 했고 거기다 주인공까지 제대로 죽여냈으니, 흥행하는 시리즈의 무조건적 속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할리우드의 마수조차 이번엔 더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순진했던 건지 아니면 할리우드의 탐욕이 생각보다 더 강했던 건지, 결국 이 시리즈도 4편이라는 속편으로 돌아왔다. 안 하느니만 못한 것처럼 보이는 속편. 지난 삼부작의 끝에 애매하게 달려있는 듯한 4편. 말그대로 사족이란 이 4편을 두고 하는 말일까 싶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4편인 <새로운 시대>는 시저의 죽음 이후 몇 세대가 지나, 이제는 완연한 유인원들의 행성으로 바뀐 지구를 보여준다. 새 부대는 준비됐으니 새 술을 담아야겠지. 시저라는 걸출한 주인공을 떠나보냈으니, 새 시리즈를 떠안을 새 주인공으로 간택된 건 시저 못지 않게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노아다. 노아는 독수리 부족의 일원이자 아버지의 인정을 고파하는 아들로서 등장한다. 일종의 성인식이라 볼 수 있는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그 재료인 독수리 알을 깨뜨려버린 노아. 하지만 이대로 아버지의 인정을 포기할 순 없다. 그렇게 노아는 늦은 밤 홀로 길을 나섰다 처음보는 다른 유인원 부족의 습격을 받는다. 가면을 쓴채 전기 충격기를 마구 휘두르며, 무엇보다도 '시저'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호전적 부족. 그들은 노아가 걸어온 길을 역으로 따라가 독수리 부족의 마을을 발견해내고 그 곳의 모든 걸 다 태워버린다. 부족의 일원들은 모두 노예로 끌려가고, 그 와중 아버지까지 잃은 노아. 노아는 황폐화된 마을 터에 아버지를 묻곤 그에 약속한다. 반드시 부족의 일원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그렇게 복수와 구원을 위한 노아의 여정은 시작된다. 


시저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지난 삼부작은 그가 집을 찾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저는 1편부터 3편까지 내내 자신이 속할 곳을 찾아왔고 그 집의 개념은 숲에서 도시로, 또 도시에서 행성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이 이어지는 4편은 노아의 말을 통해 선언한다. 지난 삼부작은 집을 찾는 여정이었으니, 이번엔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름만 시저지, 그의 일대기가 사실상의 출애굽기였듯 노아의 새 여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황폐화된 집일지라도 그곳으로 모두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영웅이다. 노아, 이름 그대로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그는 결국 부족원들을 발견해내고 또 구해낸다. 그리고 거기에서 흡사 방주와도 같은 역할을 한 인간들의 벙커가 제시되고. 심지어 그 인간들 최후의 방주를 탐내는 원숭이 왕국의 왕 프록시무스는 인간사의 고대 로마 제국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 


부분부분 편집이 조금 튀거나, 개연성 부족 등의 단점이 산재해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려하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속편이다. 그 존재가 다소 사족처럼 느껴지는 건 여전해 어쩔 수 없지만서도, 이 정도면 지난 삼부작의 기조를 성실히 이어낸 속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새 조금 더 진보한 듯한 기술적 요소는 물론이고, 지난 삼부작에 비해 조금 더 인류에게 희망을 남겨줬다는 점에서 이 이후 이어질 이야기들에도 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몇몇 단점들에도 장점들이 더 많아 네모반듯하게 느껴지는 영화인데, 그중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이 있었다. 바로 노아가 잊혀진채로 묻혀있던 천문대를 찾아내 그 안의 망원경으로 우주의 별빛을 목격하는 장면. 노아는 우연히 눈을 갖다댄 망원경을 통해, 지구 바깥의 세상에 눈을 뜬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있기에 드는 의문이 아니라 없어서 드는 의문. 보통의 감독이라면 그 장면에서 분명 노아의 눈을 통해 보여진 망원경 접안렌즈 속 화면을 한 쇼트 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의 그 장면엔 그런 쇼트가 없다. 그렇게 그 장면은 별빛이 가득한 접안렌즈 안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오직 그를 보고 반응하는 노아의 얼굴 표정만을 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접안렌즈 안에 비춰졌던 게 달이든 토성이든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다른 혜성이었든 그 물리적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단 이야기다. 그 장면은 노아가 "무얼" 보았는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무엇을 "노아가" 봤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노아는 자기가 살고 있던 세상 바깥의 더 넓은 영역을 목격한 것이고, 자신의 지식을 초월한 그 어떠한 진리를 깨우친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그를 관찰함으로써 미래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이 시리즈가 직접적으로 자주 인용했던 기독교나 다른 종교 신화들에서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장면은 선지자인 노아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묘사된 것이다. 모세가 그랬고 또 무함마드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영화 말미, 노아는 자신의 그 경험을 수나에게도 전달함으로써 또다른 종교적 신화 탄생에 불을 붙인다. 


비록 영화 속 가상의 이야기지만,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인류의 역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유인원들의 모습을 보며 일종의 처연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화합과 평화 대신, 모든 걸 불태우고 복속시키고자 하는 폭력과 지배. 그게 인류든 유인원이든 지구상 모든 역사의 초기 모습이라면, 어쩌면 바로 그게 자연의 어쩔 수 없는 이치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처연해졌다. 그러나 영화 밖 우리네 삶과 역사가 그렇듯이, 희망은 언제나 미래에 있고 그 미래는 언제나 노력에 감응하는 법. 극중 간신히 살아남아 프록시무스의 부역자 역할을 하고 있던 트레베이선은 인류의 시대를 곱씹던 메이에게 말한다. 그래봤자 현재는 유인원들의 시대이니, 과거에 머물고 있어봤자 뭐하겠느냐고. 하지만 트레베이선은 오해하고 있었다. 메이는 과거를 그리워했을지언정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이었기에. 


서로 다른 종족을 대변하지만, 어쨌든 노아와 메이는 모두 각자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냉혹하고 맹혹한 자연의 이치이자 또 섭리라 하더라도. 설사 현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손을 놓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희망은 미래에 있다는 것. 바꿔말하면, 미래는 언제나 희망으로 가동된다는 것. 그 간단하면서도 숭고한 생각과 마음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기에, 노아와 메이가 각자 종족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 / 웨스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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