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미키 17>

by CINEKOON


죽으면 프린트 되고, 또 죽으면 리프린트 된다. 우주 식민지 탐사 및 개척 임무에 '익스펜더블', 그러니까 '소모품'으로 투입된 주인공은 그렇게 미키 1에서 시작해 미키 17로 열여섯번이나 리프린트 된다. 백 번 양보하고 이해해 그럴 수 있다 치자. 대신 죽을 때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끔의 조치도 함께 해줬어야 했던 거 아닐까? 물론 영화 속의 미키는 죽을 때마다 마치 고통따위 이미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일관하긴 한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아프지 않거나 정말로 무섭지 않아서 짓는 무표정이 아니다. 그것은 달관과 피로의 표정에 더 가깝다.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걸 넘어서는 공허의 피곤함. <미키 17>이 공포스러우면서도 애닳게 다가오는 첫번째 이유는 미키의 바로 그 표정 때문이리라.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를 혐오하게 되는 이유는 그게 그저 돈이면 다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면의 진짜 이유는 사람보다 숫자가 더 크게 여겨진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의 거시적 관점에서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고 가족과 친구관계는 어떻게 되며 또 그간 살아오며 느낀 감정들은 어떻게 되는지 따위 아무래도 중요치 않다. 자본주의의 그 확대경 안에서 당신은 이름을 갖지 못한다. 대신 '1'이란 숫자 하나만이 당신을 대신할 것이다. 누가 누구와 일하고 있는지 따위 알게 뭐람, 이 세계에선 그것 또한 1+1에 지나지 않는 걸. <미키 17>은 제목 그대로 열여섯번씩이나 죽음을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이름 아닌 숫자로 불리는 주인공을 통해, 우주로 뻗어나간 이 자본주의 세계의 공포를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봉준호 특유의 인장이 곳곳에 박혀있는 영화로써, <미키 17>은 그 소임을 다한다. 거기엔 <설국열차>와 <기생충>으로 비롯된 계급적 투쟁에 대한 우화가 서려있으며, 동시에 <옥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환경주의적 태도 또한 동화처럼 얽혀있다. 급속도로 우경화 되어가고 있는 스크린 바깥의 현실을 도대체 어찌 예언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해당 사항에 대한 영화의 통찰력 또한 신묘하다. 특히 트럼프야 그렇다치더라도 남몰래 아내의 명령을 받는 꼭두각시 독재자의 이미지는 정말 예지몽이라도 꿨던 건가 싶을 정도로 적확해 놀랍다. 물론 반쯤은 농이다. 언제나 역사는 반복되니까. 생각해보면 부부 독재자의 사례 역시 인류 역사에 있어 빈번했었으니.


하지만 계급적 투쟁과 환경주의 다 물러세우고... 그냥 극중 미키의 처지가 너무 안쓰러워 슬펐다. 미키는 과거 어린 시절, 차의 조수석에 앉아있던 자신이 눈앞의 빨간 버튼을 무심코 눌렀기 때문에 이 모든 사단이 일어났다 자조한다. 또 학창 시절 과학 실험 시간에 해부용 개구리를 두고 장난쳤던 것까지 복기하며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자신의 과거 그 모든 행동들에 대한 업보이자 벌이라 믿는다. 그는 그렇게 모든 비극의 시작점으로 스스로를 지목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과거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때 올바른 결정을 했더라면, 그 때 투표를 다른 후보에게 했더라면 지금의 현실은 바뀌었을지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인간이고, 인간은 모두 실수를 한다. 인간이 실수하지 않는 존재였다면 애당초 신 따윈 필요 없었을 테다. 그러니 당신이 설령 잘못된 선택을 했고 또 잘못된 투표를 했더라도. 그걸 탓할 순 없는 것이다. 탓하고 싶지도 않고. 왜냐면 중요한 것은 지금이니까.


극의 결말부, 미키는 일종의 환상을 본다. 휴먼 프린터에서 자신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독재자가 다시 리프린트 되는 꿈. 생각해보면 독재자 케네스가 다시 리프린트 되기 전 미키는 또 한 번 빨간 버튼을 눌렀었다. 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의 소스 형태로 말이지. 찍어 먹어본답시고 바닥의 그 소스를 손가락으로 눌렀던 미키는 그 직후 리프린트 되는 독재자의 모습을 목도한다. 이름없는 노동자들이 또다른 이름없는 노동자들로 대체되는 것만큼이나, 우릴 노리는 사악하고 탐욕스런 위정자들 역시 언제나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오든, 아님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오든. 어쨌거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그들 역시 언제나 존재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환상의 끝무렵, 독재자의 아내이자 실질적인 실세였던 일파가 다시 빨간 버튼을 미키에게 내민다. 다름아닌 자신의 손바닥 위에 고인 핏방울의 형태로. 미키가 다시 그를 누를까 싶은 찰나, 환상은 끝나고 현실 속 미키는 정신을 차린채 이번엔 제대로된 빨간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휴먼 프린터는 폭발하고, 익스펜더블이란 인류의 비정한 역사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미키 17>은 내게 사실상 투표 잘 하라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물론 과거 당신이 잘못된 투표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그걸 논쟁하는 건 소모적일 뿐 아니라 비가역적이다. 그러니 그냥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투표를 잘하라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심사숙고해서 잘 하라고. 어쩌면 <미키 17>은 우주 최대의 선거 캠페인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다른 거 다 떠나 계속 죽어나가는 미키의 모습이 너무 섧고 짠했다. 이어지는 숱한 죽음들 앞에서도 공허한 피로로 달관한 그의 표정에서 참으로 여러 얼굴들이 겹쳐보였다.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사망했던 한 청년 노동자를 떠올린다. 어느 제빵업체 공장에서 일을 하다 기계에 빨려들어가 사망했던 한 청년 노동자를 떠올린다. 로켓같이 배송하겠다며 직원들을 쥐어짜던 한 전자상거래 업체에서 심장을 부여잡다 사망했던 한 중년 노동자를 떠올린다. 고속도로 교각을 짓다 시설물이 붕괴해 사망했던 여러 명의 중년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비록 노동자 아닌 국가공무원이었지만, 제대로된 안전 장비 없이 수해 복구 지원을 나갔다 물살에 휩쓸려 사망했던 한 젊은 해병대원을 떠올린다.


미키의 죽음들이 전시되는 영화의 초반동안, 그러니 나는 괜시리 울적해졌을 수밖에. 그리고 바로 그래서, '미키 17'이라 뜨는 초반부의 제목 이후 '미키 반스'라는 그의 진짜 이름으로 이야기를 닫아준 영화의 태도에 고마워졌을 수밖에. 17 말고 미키 반스. 당신은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입니다. 


tempImageNKclZD.heic <미키 17> /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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