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2>
폭풍우가 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자, 잔인하게 뒤틀린 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수사 덕에 특정된 단 한 명의 유력 용의자. 사망한 피해 여성의 연인이었으며, 목격자들의 일관된 진술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 날 그 여성과 크게 다퉜다던. 게다가 온몸에 문신까지 가득한 전직 폭력배다. 그렇게 구속된 그를 심판하기 위해 모인 12인의 배심원들. 헌데 배심원들 중 한 남자가 좀 이상하다. 재판 과정에서 사건의 객관적 사실들이 고해지는 동안 마치 자신이 대신 선고받는 사람이라도 되는양 시선을 아래로 떨구던 그 남자. 잘생기고 가정적인데다 언뜻 보았을 때 사람까지 선해보이는 그. 그에겐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배심원 #2>의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장르적으론 강력한 힘을 낸다. 아무래도 법정 스릴러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좀 더 가까운 영화라 할 수 있을 텐데, 그건 주인공인 바른 생활 청년이 바로 그 살해 사건의 진범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세상 좋아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의 범죄를 완벽히 은폐하기 위해 해당 사건의 배심원이 되어 벌이는 싸이코패스적 행각을 손놓고 그냥 구경만 해야한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배심원 #2>가 진정으로 훌륭한 부분은 여기에 있다. 바로, 그 주인공 청년이 실제로 바르고 선한 인물이었다는 것. 주인공인 저스틴은 과거 한때 잘못된 길을 걸은 적 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진심으로 사력을 다해 변화했다. 그리고 사랑스런 만삭의 아내가 있으며, 주위 이웃들을 스스럼없이 잘 챙겨왔다. 누가봐도 선한 사람.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 그 인물이 장르적 사건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을 때 생기는 딜레마가 바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다.
심지어 저스틴이 일부러 그 여자를 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안타까운 교통 사고였다. 여기에 결과적으론 뺑소니였지만, 사건 당시 저스틴은 주위가 너무 어두웠던 탓에 자신이 사슴이라도 쳤나보다 생각하며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로 안타까운 실수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선뜻 자수하지 못한다. 알콜 중독에 빠졌었던 자신의 과거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미 전범이 있는 사람이 또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 사람을 쳤다? 경찰과 사법당국이 그를 선뜻 믿어줄리 없다.
여기서 관객들에게도 딜레마가 부여된다. 선하되 평범한 저스틴은 관객 대부분을 대변한다. 그는 정의로운 경찰관도 아니고, 하물며 잔인한 싸이코패스 범죄자도 아니다. 그는 딱 평균치만큼 선하고, 딱 평균치만큼의 가정을 이룬 사람이다. 우리가 이입할 수 있는, 누가봐도 착한 사람이란 점이 관객들의 심리를 부채질한다. 하필 유력 용의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전직 범죄자다. 제아무리 개심했다곤 하나 저 문신 가득한 사내를 다시 우리 사회에 풀어놓는 것 보다야, 이제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스틴이 살아남는 게 훨신 이득이지 않을까? 물론 그 문신 가득 사내는 아주 많이 억울하겠지만 말이다.
주인공에 대한 설정과, 또 그가 놓인 상황에 대한 설정. 딱 이 두 가지가 관객들을 자꾸 옭아매고 괴롭힌다. 곧 태어날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면 저스틴이 살아남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담 그 문신 가득 사내는? 그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걸 그냥 업보라 퉁치고 넘어가기엔 그 억울함의 강도가 너무 세다. 여차하면 그는 감옥에서 남은 평생을 지낼 판이다. 저스틴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면 말이다.
<배심원 #2>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며, 슬슬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퍼즐들을 채워나가고 있는 금세기 최고 거장의 '인간' 보고서다. 그는 생의 후반기에 들어, <미스틱 리버>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 <체인질링>과 <그랜 토리노> 등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를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해체해왔다. 그 인간의 속성 중엔 비정함도 있었고 의지도 있었으며, 간절함과 정 역시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배심원 #2>는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넣고 마구 섞은 것만 같았다. 선함과 악함,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거장의 시선. 앞서 말한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체인질링>, <그랜 토리노> 등이 프레임 밖의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 여운을 주는 영화들이었다면, 이번 <배심원 #2>는 관객들이 스스로의 몸을 사정없이 배배꼬게 만든다. 그런 거장의 관록에, 나는 저항없이 그저 마구 꼬일 수밖에. 감독님, 부디 만수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