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배움엔 끝이 없다. 비록 당신이 그 실력과 기교로 온 세상을 무릎 꿇리고 제패했다 하더라도, 언제나 더 배울 '한 치'는 존재하는 법이다. 조훈현에게 그 '한 치'란 패배를 인정한채 더 나아가는 법이었고, 또 그를 가르쳐준 스승이란 자신의 내제자이기도 했던 이창호였다.
사실 스포츠 영화만큼이나 왕도적인 장르가 또 없다. 주인공 또는 그가 속한 팀은 백이면 백, 약체다. 다른 장르면 몰라도 결국 스포츠 영화는 언더독 서사와 제일 잘 붙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무시를 받던 외인구단이 결정적 승부처에서 또다른 강팀을 물리치고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둬내는 것. 어쩌면 그게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의 승부수일 것이다. 헌데 <승부>는 바둑을 소재로한 스포츠 영화로써 특이한 길을 간다. 주인공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전체를 정복한 실력자로 시작해, 이후에도 떵떵거리다 결정적 순간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게다가 안타고니스트로 설정되어 있는 인물도 마냥 재수없는 라이벌 타국의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발탁하고 길러낸 내제자이지 않은가.
제자인 이창호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직후, 조훈현의 태도가 영 안 내켰다. 패배한 거? 당연히 분하고 짜증나겠지.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키운 제자에게 진 거잖아. 거기다 그걸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잔뜩 있었고. 그럼 그게 진심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이창호와 기자들 앞에서는 체면치레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내가 널 잘 가르쳤구나, 청출어람이네~"라며 너스레는 한 번 떨어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겨우 그 한 마디를, 겨우 그 거짓말을 한 번 못해서 이긴 이창호도 불편하고 그걸 보는 기자들과 동료들도 불편하고 심지어는 함께 사는 아내도 불편하고... 그리고 다 떠나서 그렇게 말해주는 게 더 멋있잖아? 하여튼 나였으면 안 그랬을 것 같단 말이지.
근데 바로 거기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승부사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하는. 바둑은 물론이고 축구든 농구든 애초에 난 스포츠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다. 헌데 승부사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자고 나발이고, 가족이고 나발이고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승부는 승부이니 최선을 다 해야한다는 정언명령. 그래서 이기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고, 또 그래서 지면 그렇게 우울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어쩌면 그런 집착과 자존심이야말로 승부사들의 기질이 아닐까 싶었다.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적절하고, 또 주연배우를 위시한 출연배우들의 연기 면면이 다 훌륭하다. 그러나 역시나, <승부>가 멋져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일견 소인배처럼 보였을지언정 바로 그 승부사들의 세계를 너무나 인간적으로 다뤘기 때문이었다. 도통 꺾이지 않고 물러섦이 없어 더욱 아름다운 그 세계. 비록 나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스크린을 통해 영화로만 바라볼 수 있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