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제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나치에 의해 박해받았던 헝가리의 유태인 라즐로 토스는, 아내와 헤어지는 등의 갖은 고생 끝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지난하고도 비참하고도 애절했던 핍박의 세월. 그 끝에 가까스로 도착한 기회의 땅. 배를 타고 뉴욕에 가닿은 그 라즐로 토스를 반기는 건 역시나 자유의 여신상 그녀다. 뉴욕을 통했던 모든 이민자들이 거쳐갔던 그녀의 품.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헌데 <브루탈리스트>는 그런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뒤집어 보여주며 강렬한 이미지 끝에 의문의 아릿한 맛을 남긴다. 왜 라즐로 토스가 본 자유의 여신상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을까. 왜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을 전복시켜 관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브루탈리스트>가 흔하디 흔한 아메리칸 드림, 또는 미국내에서 결국 희망을 찾아가는 일반적인 이민자 서사에 완전히 반(反)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라즐로 토스의 십여년을 뒤쫓아가며, 그가 미국에서 겪고 받은 수난들을 있는 그대로 전시해낸다. 물론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때때로 라즐로를 면박주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라즐로는 예술가답게 예민하고 감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또 때로는 매춘과 약물에 젖어 스스로의 인생을 파괴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극중 해리슨 리 밴 뷰런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리라, "당신네 족속들은 핍박받을 짓을 하면서 왜 핍박받는다 울부짖는 거지?"
하지만 관객들의 그러한 감정은 일시적이고 미시적인 것일 뿐, 거시적으로 본다면 라즐로 토스는 계속해 내몰렸기만 했기 때문에 결국 불행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핍박받을 짓"이란 없다. <4등>이란 영화가 "세상에 맞을 짓이란 없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비록 누군가 보기에 참으로 개탄스럽고 얄밉고 바보처럼 보일 짓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를 두고 마음대로 속여먹고 강간하고 핍박해도 된다는 법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맞다. 라즐로는 그렇게 불합리한 핍박의 연속으로 삶을 저당 잡혀 간다. 미국 땅에 도착해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그 모두가 일정부분씩 '미국'이란 나라와 '미국인'이란 국민들의 부정한 면을 대변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라즐로에게 잠자리와 일거리를 제공해준 사촌 아틸라는 미국인들이 가족적인 이미지를 좋아한다 말한다. 이어 그의 아내 오드리는 라즐로의 코 모양을 두고 궁금해한다. 두 사람을 통해 라즐로는 미국인들이 가족이란 개념을 중히 여기면서도 자신과 같은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경계어린 호기심을 갖고 있단 걸 알게 된다. 물론 오드리를 통해서는 이후 더 큰 교훈을 얻게 되지. 미국인들이란 거짓말과 기만에 능하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남의 민족을 갈라치기 시켜내는 데에도 마찬가지.
밴 뷰런 가족도 마찬가지다. 특히 해리슨 리 밴 뷰런은 첫 만남에서 라즐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그를 쫓아냈다. 그리곤 이후 라즐로가 설계하고 제작한 자신의 서재가 대서특필되자 그제야 그를 찾아와 새로운 일거리를 맡기며 친근하게 군다. 일견 호전적이다가도, 무언가 받아먹을 떡고물이 생기면 그 땐 또 사근사근 다가와 부와 권세를 과시하는 국가. 그러다 또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 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국가. 그리고 결국엔 상대를 강간까지 하게 된다는 국가. 이러한 해석이 마냥 오독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영화가 해리슨 리 밴 뷰런을 퇴장시킨 방식 때문에 그렇다. 해리슨 리 밴 뷰런은 그야말로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곤 그 최후나 후일담 등이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이런 인물은 인물 그 자체로 퇴장했다기 보단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발했다 봐야할 것이다.
너무 계산적인 중립 유지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 좋은 미덕들도 갖추고 있다. 많은 이민자들의 무대가 되어줬으며, 다문화적인 가치관으로 세계 통합에 일조한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현 세계 초강대국으로써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까진 그 무게와 균형을 잘 이어나가고 있다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있다고 해서 그간 쌓여진 부정들이 해리슨 리 밴 뷰런처럼 그냥 사라져버리진 않는 것.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 토스란 한 이민자 개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런 미국의 그림자를 탐구하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극중 라즐로 토스가 설계한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축물처럼, <브루탈리스트>는 빛이 새어들어와 역사가 쌓이는 영화다. 전쟁과 박해, 이민과 생활 등이 마구 뒤섞이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영화는 그 빛마냥 관객들 마음 안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그리고 그렇게 시나브로 쌓여가는 라즐로 토스란 한 개인의 삶. 그러나 다 쌓인 걸 뒤돌아 보니, 그건 비단 라즐로 토스란 한 개인의 삶 뿐만이 아니었더라.